Scribbles2009. 7. 7. 03:58

위 로고는 지금 쓰는 Cheil Worldwide가 되기 전, Cheil Communications 시절의 로고입니다. ^^


제일기획을 나온지 이제 공식적으로 한 달이 됐습니다. 매일 하던 출근을 안해도 되고, 일요일 밤 괜히 우울해지지 않아도 되고,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은 생각했던 것처럼 색다르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더 좋은 점은 오랫동안 못만났던 사람들을 만나 그간의 불성실함에 용서를 구할 수 있었다는 점이더군요.

반면 항상 때맞춰 나오던 월급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더 많이 고통스러웠습니다. ^^ 삼성전자의 2분기 영업이익이 2조를 넘었다는 뉴스나, 이번달 거의 모든 계열사들이 PI (보너스) 잔치를 벌일거라는 이야기가 더이상 저와는 관계 없는 소식이라는걸 되뇌어야 한다는 사실두요. ㅋㅋ

 

제일기획을 처음 들어간 건 2003년 10월이었습니다. 그해 봄에 학위를 받고 놀다가, 생각보다 일찍 취직을 하게 됐었죠. 공부를 좀 오래 했다는 이유로 (현재는 '커뮤니케이션 연구소'로 간판이 바뀐) 당시 브랜드마케팅연구소에 배치되었습니다. 지금은 마케팅 전략본부장이 되신 상무님이 당시 연구소장으로 계셨고, 지금 연구소장을 맡고 계시는 수석님은 당시 제 셀장님이셨죠.

제가 마음대로 혼자 만들어서 보고서에 쓰기도 했던
브랜드마케팅연구소 로고입니다.

 

출근하고, 첫날 점심을 먹고 당시 팀장님께서 내려주신 첫번째 프로젝트가 '광고 모델 데이터베이스 구축'이었습니다. 알겠다고 말씀은 드려놓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악소리가 났었습니다. 공부만 하던 머리로 생각했던 '광고 모델'은 각종 광고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모형들을 의미하는 거였으니까요. 그런 모형들을 모으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라니, 모형을 만들만큼 다양한 모형이 있느냐는 문제는 차치하고 그런 데이터베이스를 왜 만들어야 하는건지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

그리고 며칠 후 이어지는 팀장님의 부연설명은, 그런 광고모델이 아니라, 광고에 등장하는 모델들, 즉 연예인과 유명인사들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라는 의미였죠. (휴~~!!!)

첫 프로젝트라 특히 의욕에 불탔던 기억이 납니다. 수천 명 유명인사들의 프로필을 모으고, 분류 기준을 만들고, 정리하고, 연예인의 경우 시시각각 바뀌는 출연작 정보를 업데이트해야 하는 등 극도로 노동집약적인 업무가 많았던 관계로 제 밑으로 단기 아르바이트만 10여 명을 뽑아서 회의실 하나를 전세 내서 일했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대리급) 고급 알바 1~2명은 거의 매일 사무실에서 저와 밤을 새가면서 일했었구요. (이 일 때문에 제 사비를 털어 사무실에 라꾸라꾸 침대를 사다놓았던 기억도....)

게다가 유명인사들에 대한 소비자 인식 등을 새롭게 조사해야 했기 때문에 새로운 조사 방법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 큰 일이었습니다. 특히 연예인들의 이미지를 어떻게 수치화할 수 있을 것인지, 어떤 제품 광고에 어울릴 것인지 분석하는 방법이나, 향후 유망주를 남들보다 먼저 발굴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 관건이었죠.

예를 들면, 현재 김연아 선수가 하우젠 에어컨 광고에 출연 중인데요, '에어컨 = 시원 = 얼음 = 아이스 스케이팅 = 김연아'의 연상 고리는 사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거겠죠, 굳이 무슨무슨 방법론을 쓰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연결고리가 아니라 '하이트 맥주 = *** = *** = 추성훈' 과 같이 좀더 추상적인 연결고리를 짜는 것, 그리고 그것을 소비자들이 공감할 수 있게 돕는 것이 '방법론'을 개발하는 겁니다.

사실, 타 광고 대행사와 조사회사들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하고, 몇몇 회사는 제일기획처럼 방법론을 만들고자 하기도 합니다. (예: 김연아, 광고모델 호감도 115위였는데… - 동아일보 기사) 하지만 대부분 비슷한 딜레마를 갖고 있죠. 바로 '유명한 연예인이 모든 업종 광고에서 높은 선호도를 차지'하는 '지명도의 딜레마'입니다. 이 때문에 이영애 -> 전지현 -> 김태희 -> 김연아로 이어지는 모델 싹쓸이 현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조사를 하든 '이 광고는 전지현이 (혹은 김연아가) 모델을 하면 소비자가 가장 좋아할 것'이라는 결과가 나와버리니까요.

따라서 이런 상황은 광고대행사가 의당 해야 하는 '진정한 광고 모델 분석'에 한계로 작용합니다. 광고주가 대행사에게 돈을 주고 광고모델 분석을 의뢰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톱스타만큼 돈을 안쓰고도 톱스타만큼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모델안 도출', 혹은 '톱스타를 써야한다면 왜, 어떤 기대효과로 써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위해서인데요, 기존에 있던 조사만으로는 항상 김태희, 장동건, 소지섭만 답으로 나올테니까요.

그리고..
이런 딜레마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 개발에 골몰하던 중 이른바 '연예인 X파일' 사건이 터집니다. 2005년 1월 17일의 일이죠.


이제는 사람들이 정말 옛날 이야기처럼 이 단어를 꺼내고, 저도 옛날보다는 상처가 많이 옅어졌지만,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습니다. 등장하는 연예인 분들, 문건에 등장하는 분들만큼은 아니었겠지만, 제 개인사에도 굵은 획을 그은 사건이었죠.

사건의 전말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기승전결은 예전에 발표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위 그림에도 나와있듯) 제일기획이 조사업체와 함께 광고 모델계 (연예계) 전문가 분들을 인터뷰했고, 그 내용의 일부가 왜곡된 채 누군가의 실수로 외부로 유출된 사건인거죠.

하지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사실은, 그 인터뷰 조사는 문건에 등장하는 것 같은 내용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쭉 설명드렸듯, 당시 제일기획은 모델의 장래성(특히 유망주의 경우)을 예측하기 위한 방법론을 개발하는 중이었고, 위 조사의 실제 인터뷰 역시 그런 내용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인터뷰에서 거명된 '장래성 밝은 유망주', 그리고 '주목해야 할 신인과 특기' 등은 여러 사람의 크로스체크를 거쳐 충분히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만 제일기획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이 됐습니다. 그것도 (PPT가 아닌) 단순 텍스트 형태로 말이죠.

하지만 외부에 공개된 이른바 연예인 X파일은 저희가 원치 않는 인터뷰 내용, 즉 사실 관계가 크로스체크되지도 않았고, 인터뷰이(= 전문가분들)가 답변했는지 정확하지도 않은, 주관적, 흥미용 문건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필요없는 문건이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파기해 달라'고 부탁한 문건이었습니다만, 황당한 사건으로 이것이 외부에 알려졌고, 이후에는 들불처럼 퍼져나갔습니다. 제일기획이 필요로 했던 중요 내용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고, 인터뷰를 하신 분들이 하지도 않은 말들까지 포함되고 부풀려져서, 심지어는 받은 사람들이 임의로 수정한 버전까지 더해져서 말이죠. (이 때문에 저는 여러분께서 보셨을 X파일은 아마도 원본과 많이 다른 내용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 때문에 검찰에 몇 차례씩 불려다니고, 팔자에 없던 법 공부를 해가면서 검사와 각을 세우기도 하면서 '아슬아슬한' 상황까지 가는 등 저 개인적으로도 고생을 했습니다만 (검사와 싸웠다니까 다들 미쳤다고 하더군요), 사실 더 가슴아픈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사건 당시, 연예인 분들은 물론, 연예인이 아닌 많은 분들의 실명이 문건에 거론되었었죠. 저는 회사에 속해 있어 외부에 거의 노출되지 않았었지만, 실명이 공개된 분들 중에는 회사를 그만 둔 분도 계시고, 남아계신 분 중에도 분야를 바꾸기도 하시는 등 많은 분들이 큰 고초를 겪으신 것으로 압니다. 게다가 이 건으로 고생한 연예인들까지 생각하면....  이 빚은 어떻게 다 갚나 싶습니다. 그 분들께는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개인적으로 고생한 것보다 이 일 때문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잃었다는 점이 아직도 가슴 한구석 무겁게 남아있습니다. 회사 밖으로도, 안에서도, 심지어 개인적인 관계에서까지도 말이죠. 

사고가 마무리되고, 제일기획은 그와 같은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연예인 X파일 2탄이라는게 (아마도 증권가에서?) 나왔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만 해도 X파일 단어만 들어도 벌떡 일어날 때라.. 굳이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 설명드렸듯, 당시 제일기획은 모델의 성공가능성을 예측하기 위한 방법론을 개발하는 중이었고, 이런 사고를 겪게 된 것도 어쩌면 방법론 개발에 있어 그만큼 별별 고민을 다 해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과 고민이 제일기획의 모델 제안 시스템을 지금처럼 업계 일류로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구요.

 

사고가 모두 마무리된 이후에는 연구소 본연(?)의 브랜딩과 마케팅 컨설팅 업무를 많이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제는 그 때 함께 일했던 분들 중 대부분이 연구소 밖, 혹은 회사 밖에 나가계시는군요. 

2006년 1월에는 연구소를 떠나 인터랙티브팀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원래 전공이 인터랙티브 광고였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올립니다.


Posted by eca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