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실려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너무 친숙한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 아름다운 이야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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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갑자기 사립문이 삐꺽 열리면서 아름다운 스테파네트가 나타났습니다. 아가씨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양들이 뒤척이는 서슬에 짚이 버스럭거리며, 혹은 잠결에 '매' 하고 울음소리를 내는 놈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모닥불 곁으로 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염소 모피를 벗어 아가씨 어깨 위에 걸쳐 주고, 모닥불을 이글이글 피워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둘이는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중략)
"칠월이라 밤도 아주 짧습니다. 아가씨, 잠깐만 꾹 참으시면 됩니다."
"그게 정말이니? 너희들 목동은 모두 점장이라면서?"
"천만에요, 아가씨,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남들보다는 더 별들과 가까이 지내는 셈이지요. 그러니, 평지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별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더 잘 알 수 있답니다."
(출처: 만화 '추리닝')
"어머나, 저렇게 많아! 참 기막히게 아름답구나! 저렇게 많은 별은 생전 처음이야. 넌 저 별들 이름을 잘 알테지?"
"아무렴요, 아가씨. 자! 바로 우리들 머리 위를 보셔요. 저게 '성 쟈크의 길(은하수)'이랍니 다. 프랑스에서 곧장 에스파니아 상공으로 통하지요. 샤를르마뉴 대왕께서 사라센 사람들과 전쟁을 할 때에 바로 갈리스의 성 쟈크가 그 용감한 대왕께 길을 알려 주기 위해서 그어놓은 것이랍니다... 저편 좀 낮은 쪽에, 저것 보십시오. 저게 '갈퀴' 또는 삼왕성(오리온)이랍니다. 우리들 목동에게는 시계 구실을 해 주는 별이지요. 그 별을 쳐다보기만 해도, 나는 지금 시각이 자정이 지났다는 걸 안답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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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웬 난데 없는 '별' 타령이냐면, 문득 증강현실 (AR, Augmented Reality) 의 발전이 위와 같은 이야기를 더 드라마틱하게 할지, 아니면 아예 일어날 수 없게 만들지 혼자 공상을 해보았기 때문입니다.
증강현실은 매우 다양한 정보 layer를 사용자에게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위 소설에서의 스테파네트는 목동이 전해주는 별들에 대한 이야기에 푹 빠져들고 있습니다만, 만일 프랑스 뤼르봉 지방에 사는 2010년의 스테파네트가, 남자 친구가 들려주는 별들에 대한 똑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별자리 AR 어플리케이션이 탑재된 스마트폰을 별들에게 비추어보고 있다면, 그녀는 아마 사뭇 다른 대사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빠. 정확히 알고 말하는 거 맞아? 여기 앱을 보면 은하수는 시각과 계절에 따라 항상 뱅글뱅글 돌고 있기 때문에 방향을 가리키는 지침이 될 수 없대. 성 쟈크는 어쩌면 샤를르마뉴 대왕을 길을 알려주기보다 헛갈리게 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그어놓았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지금이 겨우 자정 밖에 안됐다는게 무슨 소리야? 7월에 오리온 자리가보이면 적어도 새벽 5시는 된거라고. 더 늦기 전에 집에 가야 할텐데 자정밖에 안됐다면서 거짓말 하는 이유는 뭐야? 아니면 그냥 무식한거야?"
('별'의 천문학적 오류에 대해서는 '알퐁스 도데, <별>의 과학적 고찰'을 참고했습니다. ^^)
AR이 이렇게 로맨틱한 '구라'의 순간을 낱낱이 까발릴 수 있다는 건 차치하고, AR이 가져다 주는 증대된 정보가 '목동'과 '스테파네트'에게 똑같은 혜택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 혹은 스테파네트에게만 더 큰 힘이 되어줄지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마트폰을 살 여력이 없는 목동은 예전과 같이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옛날 이야기에 의존하거나, 학교 공용 PC에서 찾아본 별자리 이야기를 기억해 두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반면 아가씨는 아이폰에 Skymap 같은 별자리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해 두고 언제든지 관련 정보를 불러올 수 있을 거구요.
인터넷, 혹은 웹이 지식 격차를 해소하는데 공헌했다는 연구 결과는 도처에 있습니다. (반론도 있지만요.) 웹에 들어있는 정보의 양은 너무나 방대하기때문에 일단 웹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주면 소득 수준 혹은 사회적 지위에 따른 정보의 빈부격차가 어느 정도 해소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는 공공학교에서의 인터넷 보급, 사회 내 초고속망 확장, 저가 PC의 보급 등과 같은 '운동의 방향'에서 볼 수 있듯, 정보 접근의 공공성을 강화하는데 주안점이 있습니다. 즉 PC와 초고속 인터넷망은 모두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 정보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편의성을 개선해 준 것이지요.
그러나 모바일을 필두로 하는 AR과 AR 어플리케이션들은 PC/인터넷 접속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 합니다. 모바일은 개인적 기기로서 공유될 수 없고,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정보의 접근을 제공하기 훨씬 더 어렵다는 근원적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즉 모바일을 통해 강화되는 개인의 정보력은, 공공의 노력으로 그 격차 (소득수준 및 사회적 지위에서 오는 격차) 를 줄이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가진 사람은 더 고급의 (개인화 되고 강화된) 정보를 갖게 되고, 못 가진 사람은 정보에의 접근이 차단되거나, 범용 정보에만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클라우드 컴퓨팅이 이같은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텐데, 설사 모든 정보를 구름에 띄워두고 저렴한 모바일 단말기로도 누구나 정보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해도 정보의 격차는 쉽사리 해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디에나 정보가 넘쳐나는 2010년대에 중요한 것은 더이상 '정보에 대한 접근성' 혹은 '정보 접근에 대한 공공성'이 아니며, '누가 더 맞춤형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느냐', 즉 '개인화된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맞춤형 정보는 당연히 유료일 수 밖에 없구요.
이는 비단 AR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과거에 '정보의 총량'과 '정보에 대한 평등한 접근권'이 문제였다면, 정보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현재의 문제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양질의 지식을 조직해 낼 수 있는 역량'이 되겠죠. 이같은 역량을 무료로 제공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므로, 지식 격차의 확대는 AR 뿐 아니라 교육을 포함한 다른 종류의 서비스에서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은 아닐까 우려됩니다.
왠지.. 세월이 흐를수록 목동은 점점 '아가씨'를 꼬시기 어려워질 듯한 느낌인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개인화된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