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미디어법 개정에 대한 글 2부를 쓰고 난 후 보니 흥미로운 미디어법 관련 기사가 두 건 올라왔네요.
먼저, 민주당 변재일 의원이 "미디어법효과 일자리 2만개 창출 왜곡" 이라고 주장한 내용입니다.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와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하 KISDI)가 제시한 GDP 수치의 왜곡으로 2만개 일자리가 생긴다는 한나라당의 논리가 허구라는 이야기입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방통위와 KISDI는 미디어법을 개정해서 대기업, 신문사, 해외자본에 의한 방송사의 경영을 허용할 경우 2만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긴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치는 2006년 우리나라 GDP를 기준으로 산출된 것입니다. GDP가 무슨 상관이냐고 갸우뚱 하실 수도 있지만, 이 수치는 우리나라에서 방송시장이 차지하는 비율을 계산하는데 쓰이는 쟁점 수치입니다. 즉, GDP 대비 방송시장이 크냐 작냐에 따라 앞으로 더 성장할 여지가 있느냐 없느냐를 짚어볼 수 있고, 성장할 여지가 많다면 일자리가 늘어날 가능성도 커지겠죠. 아래를 보시죠.
방통위와 KISDI, 한나라당은 2006년 1인당 GDP가 2만6천달러(총 1조2천948억달러)로 설명하면서, 아래와 같이 2만개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1) 위 수치에 따르면 GDP 대비 우리나라의 방송시장 비율은 0.68%에
그침.
(2) 이는 선진국 평균 0.75%에 크게 못 미치며,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비해 방송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음.
(3) 미디어 소유 규제를 완화하면 방송 시장의 GDP 대비 비중은
선진국 수준인 0.75%로 상승할 것으로 예상됨.
(4) 이 때 2만개의 일자리가 추가로 생길 것으로 추정됨.
(사실 이 2만개라는 추정도 논리가 취약합니다만, 이건 별도의
문제이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올려보도록 하지요.)
그러나 방통위와 KISDI가 사용한 2006년 1인당 GDP 2만 6천달러는 "정체불명의 자료"라는 것이 변 의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주장입니다. 한국은행, 세계은행, IMF 등 대부분의 공신력 있는 기관들은 2006년 대한민국의 1인당 GDP를 1만 8천달러라고 발표했다는 거죠.
1만 8천달러라는 비교적 공신력 있는 수치를 대입할 경우, 우리나라의 GDP 대비 방송시장 비율은 0.98%에 달하게 됩니다. 즉 0.75%라는 선진국 수준을 크게 상회할 뿐만 아니라, '시장 포화상태에 가까운 상태(전국언론노동조합)'가 되는 셈입니다.
언론노조는 "이런 상태에서 방송 소유 규제를 완화하면 생산 유발효과나 취업 유발 효과가 나타나기보다 과당 경쟁으로 마이너스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떤 마이너스 효과인지 분명히 나와있지는 않습니다만, 과당 경쟁으로 인한 시장 환경 악화는 예상할 수 있겠죠. 굳이 예전의 신문 구독 유치 과열로 인한 폐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경쟁의 당사자가 신문사, 방송사, 대기업이라면 이전투구에 가까운 양상을 보일 것이라고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KISDI는 이 '정체 불명의 수치'에 대한 논란에 '자신들이 인용한 국제기구 ITU의 유료 데이터 통계가 ITU 홈페이지 통계와 달라서 빚어진 일'이라고 해명했지만, 결국은 대외적으로 알려진 수치와 다른 수치를 사용했음을 인정한 셈이 됐습니다. 자신들이 사용했다는 유료 데이터의 실체에 대해서는 'ITU의 유상판매 통계DB 캡처'라는 스크린 캡처 한 장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KISDI는 여기에 더해 해당 수치가 방송위원회가 발간하는 '방송산업실태조사 보고서'에 기초한 것이라고 해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국내 방송플랫폼 시장의 명목 GDP대비 비율 추이' 중 아래쪽 도표 참조) 그러나 여기에서 등장하는 명목 GDP가 ITU의 '유료 데이터'와 어떻게 같고 다른지, 한국은행, 세계은행, IMF 등에서 발표한 GDP 수치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출처 없는 정체 불명의 수치'라는 비난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고의로 방송시장의 비율을 낮추려고 했다는 심증이 들기에는 충분한 상황이죠.
게다가, 자신들이 사용한 수치가 ITU의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수치보다 왜 훨씬 부풀려진 수치인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홈페이지에 발표한 통계와 유료로 판매하는 통계가 다르다는 것은 상식 밖입니다. 유료로 제공되는 수치를 홈페이지에서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는 경우는 있을 수 있지만, 수치가 다르다면 거기에는 원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원인은 의외로 쉽게 풀렸습니다. KISDI가 아니라 (KISDI가 고소하겠다던) MBC에 의해서 말이죠. MBC 보도에 따르면 ITU가 이번 건이 쟁점화 된 이후 KISDI가 인용한 GDP가 부정확한 수치임을 인정한다고 답을 했다는 점입니다. (기사 참조) ITU의 유료 데이터에서는 평균 환율이 약 20년 전 수준으로 잘못 입력되어있었다고 하는군요. 수많은 박사 연구원들이 있는 KISDI에서 이걸 모르고 썼다고 보기는 힘들겁니다. (그러면 아마도 연구원들이 KISDI를 상대로 명예훼손 고소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죠.) 어쨌든 언론노조의 비판처럼, "ITU 홈페이지의 수치도 애써 외면한 채 유독 부풀려진 GDP 수치를 인용하여 우리나라의 GDP 대비 방송시장 규모를 축소시켰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습니다. 하지만 KISDI는 조작 의혹을 제기하는 MBC 언론 보도에 대해 민형사상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합니다. 그보다는 사실을 먼저 밝히는게 우선일 듯 한데 말이죠.
한 가지 궁금한 점 -- ITU는 국제전기통신연합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 입니다. GDP 수치를 왜 이곳에서 구해야 하는 걸까요? 저도 나름 신문방송을 전공한 사람이지만, ITU는 GDP를 구할 때 들어가보는 곳이 아닙니다. ITU가 뭐하는 곳인지는 여기에서 깔끔하게 설명하고 있네요. KISDI와 방통위는 왜 한국은행, 세계은행, IMF 등의 수치를 쓰지 않은 걸까요? KISDI가 선호한 ITU의 수치는 왜 한국은행, 세계은행, IMF 등의 수치와 다른 걸까요? (이건 위 MBC 보도에서 설명된 셈이겠군요.) KISDI는 GDP 수치를 얻을 때 가장 먼저 찾아볼만한 한국은행, 세계은행, IMF 등의 수치를 본 후 "그래도 ITU 수치를 쓰자"고 결정했던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방송시장이 아직 성장 여력이 많디는 결론을 미리 내놓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 공상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기사. "한나라당 '미디어법 13일 처리' 최후통첩"입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한나라당 국회 문방위 간사이자 우리 시대의 파워우먼이신 나경원 의원께서는 어제(7일) 오전 민주당과의 협의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미디어 관련법을 13일 본인 소관 상임위인 문방위에서 처리하겠다고 통보하셨다고 합니다.
나경원 의원의 개인 스토리를 듣고 한때는 (개인적으로) 나의원의 감성적 팬이었습니다만,
우리나라의 정당정치에서 그런건 다 무용지물이라는...
똑똑하신 분이니, 지금이라도 용감하게 진실의 편에 서시는게
진정한 파워우먼으로 사랑받는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 이 최후통첩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지네요. 지난 2월달에 처리하려다가 육탄전이 벌어져서 안했고, 그래서 6월까지 장장 100일 동안이나 협의하고 국민의견 수렴할 시간을 줬는데 그게 안됐고, 시한인 6월이 다가왔으니 이제는 무조건 직권 처리하겠다는 셈입니다.
이런거죠. 자동차가 고장나서 수리를 맡기고 일방적으로 하루동안의 말미를 줬습니다. 다음날 찾아간 센터에서는 고장 원인을 찾는데만도 하루는 부족했다면서 수리가 안됐다고 하는데, 차주는 시간이 없으니 가겠다면서 차를 몰고 가버리는 상황..?
100일간 공청회는 겉돌거나 무산되고 (관련기사 참조), 여론을 수렴할 기회는 커녕 미디어법 개정안에 대한 충분한 설명도 되지 않은 기간이었습니다. 물론 나경원 의원이 보기에는 이런 법안을 국민에게 설명하는 것은 굳이 필요치 않다고 느꼈을 수도 있지요. 미디어법같은 (복잡한) 법안에 대해 여론조사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말씀을 하시는걸 보면 말입니다.
100일간 민주당이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은 것은 분명 민주당의 직무유기입니다. 이렇게 막판에 와서야 시끌시끌하게 만든 것은 잘못입니다. 어쨌든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수적 절대 우위에 있는데다가, 이번 건은 공론화 없이, 최대한 조용하게, 그리고 빠르게 개정안을 처리하는 것이 최선이었을테니 100일간 굳이 공청회나 청문회에 적극적일 이유가 없었죠. 그리고 이번 통계 조작 논란, 그리고 13일 최후 통첩 역시 똑같은 맥락입니다.
어떤 근거로 미디어법을 개정하는 것이 좋다는 것인지 근거도 확실치 않아졌고, 이게 왜 개정되어야 하는지, 뭐가 좋고 나쁜지에 대한 여론 수렴도 안돼있습니다. (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하구요.)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은 자신들의 의지대로 밀어붙이려고 하고, 그것이 대의 민주주의라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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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 후 다른 분들의 글들이 보여 몇 군데 찾아다니면서 읽어봤는데, 통쾌한 내용들이 많더군요. 우선 몇 개 소개해 드립니다. 꼭 읽어보세요~!!
- "패배의 KISDI, 무너진 H당 미디어법 근거" -- ITU의 유료 보고서를 두둔했던 KISDI의 입장과 달리 (ITU가) 웹상에 공개했던 무료 자료가 더 정확한 자료임이 밝혀짐. 이 외에도 미디어법 개정 강행을 향한 KISDI와 한나라당의 노력이 굉장히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 "KISDI : 원달러 환율 652원! 아ㅆㅂ쿰?-_-;;;" -- KISDI가 제시한 GDP 수치의 오류는 물론, KISDI가 계획적으로 목적에 맞는 수치를 선택적으로 취합, 사용하려 한 흔적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 "게임 종료. 미디어법 = 대국민사기극" -- KISDI가 한 최신 자료를 사용했다는 말은 물론, KISDI가 사용한 자료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줍니다.
KISDI의 생트집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만한 고수들이 재야에 많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 위 블로그 중 한 편을 쓰신 capcold님은 KISDI가 연구기관으로서 전통을 지키려면 책임자들을 단죄하여 털고 가는게 옳을 것이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보다 KISDI 박사님들이 양심선언을 해주는 편이 가장 바람직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쥐잡이식 책임자 색출보다는 그 편이 더 명예로울테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 기회에 국민들이 본 건의 본질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미디어법 개정이 도대체 왜 말이 안되는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한나라당이 사기성 주장을 하면서까지 본 건을 밀어붙이고자 하는 숨겨진 의도까지 낱낱이 공론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큰 꿈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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