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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3.07 Empowerment (5) 책: '읽는 행위'의 지평을 넓히기 Part 1 1

열흘에 한 편 씩 올리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한 달이나 건너뛰었네요. 이번 편은 책의 임파워먼트에 관한 내용입니다. '책'이라고 쓰긴 했지만 사실은 책을 필두로 한 인쇄매체와 사람들의 읽는 습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분량이 길어 두 번에 나누어 올립니다. ('읽는 행위의 지평을 넓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2편에 나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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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책'이라는 매체가 Empowerment라는 개념과 결합될 경우 어떤 변화와 기회가 만들어지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연히 종이책과 eBook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텐데, 그 전에 잠깐 책이라는 매체의 역사에 대해 알아볼까요?

 

책(冊)은 본디 대나무 조각을 엮은 모습을 상형화한 것입니다. 종이가 없던 시절, 대나무의 마디를 잘라내고 마디 사이를 세로로 쪼개 불을 쬐어 기름을 빼고 껍질을 벗겨낸 뒤 그 위에 글자를 적었습니다. 위아래는 20~25cm정도의 길이지만 폭이 고작 몇 cm에 불과했기 때문에 한 줄 씩 글자를 쓸 수 있었습니다. 이를 '죽간(竹簡)'이라고 일컬었는데 몇 장의 죽간을 가죽이나 비단 끈으로 엮은 것을 표현한 것이 '죽책(竹冊)' 또는 '책(冊)'이라는 한자가 되었습니다. 중국의 고전이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쓰여진 데는 한자가 뜻글자라는 점 외에도 죽간이라는 기록 매체의 특성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하죠. (임형석, '중국 간독시대, 물질과 사상이 만나다')

 


 

진시황이 분서갱유로 태운 책들 역시 종이책이 아니라 죽간들입니다. 중국에서 책이 죽간이 아닌 종이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서기 105년 채륜이 종이를 만들었을 때 부터입니다. (이집트의 파피루스는 기원전 2세기까지도 거슬러 올라갑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종이책이 자리를 잡은지 천 년이 흐른 뒤에도 죽간은 종이와 달리 특별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식되었나 봅니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왕세손이나 왕세자비를 정할 때 책봉문을 죽간에 새겨 내렸다는 걸 보면 말이죠.

 

그러니 어쩌면 옛날에 종이책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어찌 글자를 종이 따위에 써서 보관한다는 말인가!" "성현의 말씀을 보존하기에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책은 역시 대나무를 넘겨가며 읽는 것이 제맛이거늘.." 하며 탄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도 그랬듯 eBook이 등장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책'이라는 기존 매체가 주는 향수가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합니다. 책장을 넘기는 '아날로그적인' 느낌부터 종이를 접어 북마크를 해두는 느낌, 책을 읽어감에 따라 자라는 고운 손때와 책장에 꽂아두었을 때 느껴지는 뿌듯함(?), 넓은 서점을 돌아다니다 좋은 책을 우연히 발견하는 느낌, 그리고 책을 매개로 만들어지는 갖가지 인연과 사연까지, 책이라는 매체에 얽힌 사람들의 애착과 느낌은 다양합니다. 아무리 좋은 eBook이 나와도 종이책이 주는 인간적인 느낌까지 전달할 수는 없을거라고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eBook이 아무리 책장을 넘기는 이미지를 구현하고 밑줄을 치고 메모를 할 수 있게 해도 종이가 주는 느낌은 절대 재현할 수 없다고 말이죠. 


책 시장의 규모는 제한되어 있으니 eBook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책이 대중화 될수록 종이책의 시장은 어느 정도 축소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eBook이 책 읽는 문화를 바꿔버릴까 아쉬워하겠죠.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종이신문의 시장이 쪼그라든 것처럼 종이책 역시 비슷한 길을 걸을까 걱정할 겁니다. 하지만 (종이책이 아닌) 책 시장 자체가 eBook 때문에 축소될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책을 비롯한 인쇄 매체의 시장은 그 형태가 디지털로 옮겨갈 뿐 '읽을거리의 시장' 자체는 eBook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이 나와도 영향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인쇄 매체의 시장을 축소시키는 것은 eBook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죠. eBook을 비롯, 스마트폰, 인터넷, 각종 디지털 기기는 기껏해야 시장 축소의 속도를 빠르게 하는 촉매 정도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종이책과 종이신문 시장은 (적어도 우리나라와 미국에서는) 예전부터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종이신문이야 말할 것도 없고 종이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출판 시장은 도리어 커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눈에 수치로 나타나는 국내 출판 시장의 상당 부분은 참고서와 잡지,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베스트셀러가 차지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베스트셀러의 다양성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지요. 예컨대 베스트셀러로 뽑히는 책의 장르 다양성이 줄고 있다는 점 - 말하자면 '성공학' 분야의 도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점, 소수의 베스트셀러가 전체 출판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 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추세가 나타내는 현실은, 우리는 이제 '진지한' 읽을거리를 찾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당장의 필요를 위한 참고서, 성공서를 읽고, 어떤 책이 좋을지를 고민하기보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베스트셀러를 찾으며, 스포츠 신문, 인터넷, 텔레비전 등 피로하지 않게 소비할만한 읽을거리와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볼거리를 찾습니다. 뭔가가 궁금할 때 사람들은 과거의 배움과 지식에서 답을 구하기보다 검색창에 질문을 쳐넣습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찾아낸 즉각적이고 표면적인 지식을 내 것으로 소화하려 하기보다 '모르면 또 검색하지' 라고 생각하며 흘려버립니다.) 

 

이 같은 추세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책 읽지 않는 문화, 배우지 않는 문화,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문화, 읽지 않아도 큰 지장 없는 문화가 생겨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은 책에서 얻는 지식이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고 구닥다리 옛이야기처럼 치부되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존경받지 않는 (존경받는 어른들이 드물기도 하지만)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스레 잘 숙성된 글로 표현되는 지식과 콘텐츠를 찾는 사람을 줄어들게 합니다. 니즈가 줄어들면 자연히 양질의 콘텐츠도 줄어들 수 밖에 없죠. 이는 결과적으로 교육의 질을 떨어뜨림으로써 또다시 글과 지식의 질을 낮추는 악순환을 낳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쇄매체 시장에서 종이책과 신문이 처한 위기의 본질입니다. 디지털, 모바일, 인터넷은 이같은 현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가속화 할 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문제는 사실 우리나라와 미국에서 더 크게 나타나는 문제라는 점입니다. 일본이나 중국은 잘 모르겠지만 서유럽의 경우 위에서 말한 악순환은 미국만큼 발현되지 않는 듯 합니다. 섣부른 일반화일 수 있지만, 유럽만 해도 신문을 열심히 읽는 문화가 아직 남아있는 편입니다. 독자들은 신문을 통해 사회적인 이슈를 파악하고 지식을 습득하여 이를 스스로의 삶에 사용하는, 즉 '진지한 읽기를 통해 꾸준히 정보를 소화하는 프로세스'가 남아있습니다. 

 

이는 유럽의 디지털 환경이 뒤쳐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읽는 습관'과 '활자의 권위'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럽에서도 황색 언론이 발흥했지만 신문사와 신문기자는 신문의 권위와 신문 읽는 문화의 진지함, 매체의 신뢰를 지키고자 노력하고, 신문사는 권력과 거대 자본으로부터 소유를 독립시킴으로써 중립을 지키고자 노력합니다. 그리고 사회는 기자들(을 포함한 노동자들)의 고용을 안정시키는 시스템을 제공함으로써 이 같은 선순환 구조를 지원하지요. 덕분에 기자들은 말초적 기사로 독자들을 현혹할 필요가 적어지고, 안심하고 자신의 전문성을 높이는 데 노력할 수 있으며 더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데 주력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신문을 '소식지'로서만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정보와 지식, 시각의 보급처로 여기게 되고, 신문은 중요한 사회적 교육 수단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이야기가 잠시 옆으로 샜는데 본론으로 다시 돌아오자면, 우리나라와 미국에서 나타나는 인쇄 매체의 위기는 eBook이나 디지털 기기 같은 기계적 요인이 아니라, 사람들의 읽는 습관, 인쇄 매체가 사회 교육에서 맡고 있는 역할, 그리고 제대로 된 언론의 부재와 같은 사회적 요인에 더 크게 기인합니다. 디지털 기기는 사회적인 흐름을 가속화할 뿐입니다. 사람들이 가벼운 읽을거리를 찾는다면 디지털 기기와 콘텐츠는 가벼운 읽을거리를 더 쉽게 접하게 해줄 것이고, 사람들이 진지한 읽을거리를 찾는다면 eBook과 태블릿 등은 진지한 콘텐츠를 쏟아낼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애플이 최근 소개한 iBooks Author 프로그램디지털 교과서 사업은 재미있는 함의를 갖습니다. 이 두 가지 이니셔티브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키워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임파워먼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편화되어 있던 개인 저자들(author)을 임파워하는 것이 iBooks Author라면 디지털 교과서는 교사와 학생을 임파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여기에 추가해야 할 중요 수혜자는 바로 일반 독자, 즉 일반 대중입니다. 바로 모든 사람의 저자화(著者化)와 디지털 교육 콘텐츠의 대중화를 통해서입니다.  (계속)


Posted by eca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