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잠시 외국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만년필로 필기하는 걸 가르치곤 했었죠.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는 용돈을 모아 펜을 사모으는게 취미였었습니다. (공부 못하는 애들이 연필에 신경쓴다는데, 저도 그런 축이었던 셈입니다.^^) 13살짜리 아이가 살 수 있는 펜은 열심히 모아봤자 파커(Parker) 볼펜이나 샤프 펜슬 정도였습니다.
파커 펜이라고 하니 고가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아 부연 설명을 드리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파커 = 일종의 고급 펜' 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제가 살던 곳에는 훨씬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었습니다. 파커에서는 고가 제품도 만들지만 중고생들이 쓰는 '막펜' 수준의 만년필도 팔거든요. 파일롯트의 플라스틱 만년필 두세 개 살 돈이면 파커 만년필 한 자루를 살 수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이었지만 그래도 어린 학생 입장에서는 꽤 고급 필기구였습니다. 좀 '사는' 친구들이 크로스(Cross) 펜을 갖고 있었고, 몽블랑 같은 펜은 거의 '아버지가 쓰는 펜' 정도로 인식됐었죠. 지금 말로 하면 '넘사벽' 수준이었다고나 할까요?
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기 얼마 전 어머님께서 저와 제 동생에게 귀국 기념 선물을 하나씩 사주셨습니다. 몽블랑의 'Meisterstück' 만년필이었습니다.
진열장 밖에서만 구경하던 펜이었는데 내 손에 들어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죠. 넉넉치 못한 형편임에도 이걸 두 자루나 사서 나누어 주신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은 간단했습니다. "이 펜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라."
그리곤 20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Meisterstück보다 더 좋은 몽블랑 펜도 알게 되고, 그보다 더 비싼 펜을 선물 받아본 적도 있지만 저는 아직도 어머님께서 사주신 그 펜은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큰 맘 먹고 잉크를 채워본 적도 두어 번 있지만, 펜을 쥘 때마다 옛날 어머님 말씀을 스스로에게 되묻고는, 씻어서 도로 케이스에 넣어두기 일쑤입니다.
아마 저희 어머님께서는 제가 이 펜을 아직 갖고 있다는 것도 모르실 겁니다. 어쩌면 당신께서 예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걸 기억 못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펜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어머님의 말씀이 제게는 그 어떤 성인의 가르침보다 깊이 가슴에 울립니다.
저는 어쩌면 평생 이 펜을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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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결혼하고 맞은 저의 첫 생일. 아내는 제게 선물 봉투를 하나 내밀었습니다. 빠듯한 월급 받아서 대출금 갚고, 각종 관리비와 보험료 내고, 아이 기저귀 사고, 제 점심값까지 제하고 나면 정작 아내는 자신을 위해 쓸 돈이 별로 남지 않습니다. 결혼할 때는 평생 호강시켜줄 것처럼 큰소리를 쳤었는데, 막상 시집오자마자 살림이 쪼그라들어서 안그래도 무척 미안해하고 있던 참입니다.
그런 차에 아내는 제게 줄 생일 선물을 준비했던 겁니다. 게다가 아내가 내민 봉투 안에는 이른바 '명품' 지갑이 들어있었습니다. 제가 갖고 다니던 지갑이 너무 오래 돼서 귀퉁이가 해지고 심지어 구멍까지 뚫린 걸 보고 꼭 사주고 싶었다면서요.
언뜻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브랜드. 평소에 자기 용돈도 잘 못쓰는 아내가 꽤나 오랫동안 돈을 모아 준비한 듯 했습니다. 도저히 받을 면목이 없어서 저는, '너무 고맙지만 당신의 마음만 받겠다. 나는 다른 지갑도 있으니 이건 당신이 쓸 수 있는 다른 걸로 바꿔오자'고 했습니다. (실제로 지갑이 두 개나 더 있었습니다 ^^) 하지만 아내는 절대 안된다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내 남편은 이 정도는 충분히 갖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이고, 갖고 다녀야 하는 사람이다.'
그 말을 듣고 문득 부끄러워졌습니다. 나는 내 아내가 자랑하는 것 같은,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이 지갑은 내가 당신의 기대에 부응했다는 생각이 들면, 당신이 나를 자랑스러워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 때 꺼내서 갖고 다니겠다'고 말이죠.
바람 같아서는 내년이나 내후년 쯤에는 지갑을 꺼내 쓸 수 있었으면 하는데, 어쩌면 이 지갑 역시 평생 못쓰고 아들 녀석에게 가보로 물려주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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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케이스와 지갑을 담은 쇼핑백은 지금도 제 책장 안에 고이 모셔져 있습니다. 가끔씩 책장 문을 열어 바라볼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어머님과 아내가 제게 거는 기대를 읽는 듯 해서 가슴이 따뜻해지곤 합니다. 저를 사랑하고 제가 사랑하는 가족이 제게 거는 기대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제 자신에게 거는 기대이자 뜨거운 다짐이 되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는 '성공하는 것', '잘 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곤 했는데, 요즘은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 그리고 '내가 잘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힘이 들어도 좀 더 힘내자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하지요. ('잘한다'는 일을 잘한다는 의미 뿐 아니라, 그야말로 내 자신과 사람들에게 잘 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전에는 나를 움직이는 것은 내 자신의 의지와 목적 의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요즘은 그 외에도 다른, 더 큰 동인(動因)이 있다는 느낌을 갖는데 그것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대입니다. 맞는 걸까요? 맞다면 조금씩 철이 드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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