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이메일, SMS 등 통신 기술의 발달은 예상과 달리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더 가깝게 만들어 주거나 덜 외롭게 하지 못했다. 통신 기술이 친구들에게 ‘내가 원할 때 언제든 연락할 수 있다’는 ‘방법’과 ‘편의’를 제공했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친구들에게 더 자주 연락을 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같은 통신 기술이 등장하기 전에는 사람들과의 연락과 만남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친구를 떠올려도 그를 당장 만날 수 없다면, 곧바로 연락할 수 없다면, 연락을 할 수 있다 해도 며칠씩 걸리는 편지에 의존하거나 값비싼 시외전화나 국제전화를 써야 했다면 사람들은 곧장 연락을 취하는 대신 친구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고, 어렵게 연락을 하게 되면 가능한 한 자신의 마음을 정제해서 표현했을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한 달에 한 번 만날까말까 한 친구와 만나 밥 한 끼를 먹고 헤어지면 헤어진 후 혼자 있을 때도 그와의 시간을 기억하고, 친구를 그리워하며 소중히 여기는 느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서로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시간이, ‘쉽게 만날 수 없다’는 사실 — 만남의 희소성 — 이 그 사람과의 관계를 더 소중/애틋하게 여기도록 만들어주었을 수도 있고, 그를 더 그리워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정보통신 기술로는 전세계 어디에 있는 누구와도 즉시, 저렴한 비용으로 연락을 할 수 있다. 전화를 걸어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눌 수도 있지만 메신저나 이메일을 이용하면 — 마치 과거의 편지처럼 — 비실시간(asynchronous)으로, ‘바로 답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혹은 서로의 소셜미디어를 들여다보며 친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지켜볼 수도 있다. 서로 대화를 전혀 나누지 않고서도 말이다. 이처럼 서로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 언제든 쉽게 연락할 수 있다는 사실 — 만남의 풍요로움 — 은 그 사람과의 관계를 덜 소중/애틋하게 여기도록 만들어주었을 수도 있고, 우리가 친구를 그리워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있을 수 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기술의 등장 전에 비해 덜 희박하고, 덜 소중하고, 덜 값지게 된 ‘기술의 저주’라고 할 만 하다.
AI의 발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떤 정보에 대해 알기 위해서 예전에는 전문가를 찾아 묻거나,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찾는 등의 공을 들여야 했다. 정보를 가진 사람의 가치는 높게 여겨졌고, 정보를 엮어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더 높은 가치를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아무리 책과 도서관과 학교가 대중화되었다해도 정보와 지식의 가치는, 특히 그것이 새로운 정보와 지식일 수록 소중하고 희소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2000년대 초 인터넷과 검색 기술의 발달 역시 이같은 상황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곳곳에 산재된 정보를 취합하고 접근하기가 예전보다 쉬워졌을 뿐, 새로운 정보를 생산하고 지식으로 엮어내고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가치는 여전히 귀하게 취급받았다. 정보와 지식이 많아질수록 이를 읽고 판별하고 이런 지식을 다시 인터넷에 공급하는 전문가들의 능력과 가치는 예전보다 더 귀하게 취급받으면 받았지 그들의 가치가 하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같은 정보와 지식과 데이터가 인터넷에 넘쳐나게 되고, AI가 하루에 만들어내는 데이터량이 인류가 과거 수천 년간 축적한 것보다 많아진 정보 폭발 속에서, 이제는 AI가 나의 질문에 — 그것이 어떤 분야에 대한 질문이든지 — 즉각 답을 내놓는 환경이 되었다.이제는 사람들이 원하면 언제든 정보를 찾을 수 있고 지식을 접할 수 있고 답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들이지 않고 편리하고 빠르게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것’이다. 정보와 지식을 더이상 소중하고 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AI는 언제든 나에게 정보를 가져다 줄 수 있지만 이것이 내가 정보를 항상 찾아 볼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언제든 친구와 연락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친구들과 더 자주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더 가깝게 해 주지 않은 것처럼, 반대로 사람들을 예전보다 더 외롭게 만든 것처럼, AI의 발달 역시 사람들을 정보와 더 가깝게 하거나, 사람들을 더 똑똑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식’과 ‘경험’의 결합이 필요한 ‘지혜로움’이나 ‘슬기로움’같은 가치는 두말 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기술의 발달이 가져오는 혜택을 인간이 정말로 향유하려면 인간은 그 기술이 가져다 주는 혜택과 가치를 힘써 실행해야 한다. 언제든 연락할 수 있는 친구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와의 교류나 교감을 소홀히 하는 것, 실제로 친구와 대화하는 대신 그가 올리는 인스타그램 콘텐츠를 보면서 ‘요즘 어떻게 사는지 알고 있다’라고 혼자 느끼는 것은 교류가 아니다. 실제로 그를 만나 이야기 하고 교감하는 것과 같을 수 없다. 정보통신 기술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느낌’을 더 자주, 더 깊이 느끼고, 사람들과 실제로 교감하기 위해 기술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람들과 더 쉽게, 더 자주 연락할 수 있게 된 만큼 더 자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친구와의 인연이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이 없었을 때 보다 더 깊어질 수 있도록 사람이 힘써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게 된 지금, 모든 사람들과 더 자주, 많이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AI 기술의 발달이 가져오는 혜택을 인간이 정말로 향유하기 위해서는 AI 기술이 가져다 주는 혜택과 가치를 힘써 실행해야 한다. 정보와 지식과 해답을 언제든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서 실제로 찾아보지는 않는 것, ‘know-how보다 이제는 know-where가 중요하다’는 믿음으로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과 ‘지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을 동일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실제로 내가 어떤 지식을 접하고, 그에 대해 생각하고, 그에 대한 나만의 의견을 갖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통신 기술을 활용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더 인간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AI 기술을 통해 우리가 세상의 정보와 지식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내면화 하고, 개인화 하는 일을 더 힘써 실행해야 한다. 이를 통해 정보를 넘어 지식을, 지식을 넘어 지혜를, 지혜를 넘어 깨달음을 추구하는 데 기술을 능동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AI에 의존하여 AI가 제공하는 답을 나의 답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AI와 끊임없이 대화하며 내 자신을 뛰어넘도록 노력해야 한다.
AI은 이를 위한 사상 최고의 도구이다. (지혜와 깨달음 역시 언제 AI에 의해 추월당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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