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ibbles2010. 7. 23. 14:53

Image Credit: Weecorner @ Flickr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잘 할 수 있어'라고 자기 최면을 거는건 바람직하지만 '이만하면 됐어'라고 생각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옛날 학생 시절 기억을 더듬어 봐도...
시험 범위를 반복해서 공부하면 할수록, 뭔가 부족한 것 같고,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이 남아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시험 시작 직전까지 책을 들여다 봤던 시험들은 대체로 잘 봤던 반면,

'이만하면 됐다'라는 느낌이 들었던 시험 치고 잘 치른 시험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시험 보는 날 아침 '준비 다 됐다'는 사람치고 공부 잘하는 사람은 없는 것도 같은 이치.
남들이 "그만하면 됐어"라고 해 주는 말도 별 소용 없기는 마찬가지. 결국 얼마나 준비됐는지, 얼마나 잘 할 수 있는지는 본인이 잘 알고 있는 셈이죠.


요즘,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은 의사 결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험 볼 때 3번과 4번 답안 사이에서 뭘 찍을지 고민하던 것도 일종의 의사 결정이지만, 다 커서 내리는 의사 결정은 참 무겁고 어렵습니다. 시험이야 좀 못보더라도 최악의 경우 다시 보면 되지만, 사회에서의 의사 결정은 '다시'라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어떤 분이 트위터에 올려주셨던 말 중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낙관적으로 구상하고, 비판적으로 계획하고, 다시 낙관적으로 실행한다"
이것이 새로운 테마에 도전해가는 최고의 방법이자,
교세라(Kyocera)가 지금까지 이어온 신제품 개발 방법이다.

'비판적으로 계획한다'는 부분이, 쓰러질 때까지 고민하고 준비하라는 말과 비슷한 것 같아 왠지 예전 시험 준비하던 생각이 났습니다.


Posted by ecarus
Scribbles2010. 7. 23. 05:00

일에 전념하라


나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나 자신은 물론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이 손을 뻗어 도와주고 싶을 정도로 일에 전념하라. 

그러면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반드시 신이 손을 내밀어 줄 것이고,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나모리 가즈오의《왜 일하는가》중에서 -



주어진 일을 빈틈없이 꼬박꼬박 잘 하는 것도 일하는 사람의 좋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상상력을 가지고 없던 일, 보이지 않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다름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켜보며 몰입하는 것이 일에 전념하는 사람의 참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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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적으로 받아보는 '고도원의 아침편지'에 실린 글입니다. 

여기에 더해 얼마전 '시골의사'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박경철님(@chondoc)이 올리신 일련의 트윗이 있었죠. 이 분은 경제 분석 혹은 의사로 유명하시지만 생각의 깊이로부터도 배울 점이 많은 분입니다. 아래는 트윗을 제가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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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관리라는 부분을 어렵게 생각하기 쉽지만 , 내 삶의 가치배분을 위한 포트폴리오라는 생각을 가지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것 같습니다. 우리는 대개 시간관리 부분을 미시적으로 접근하죠. 학창시절 시간표 짜듯이요. 하지만 배분의 문제로 보면 간단합니다. 이를테면 몇시부터 책일 읽고 , 몇시에 운동을 한다는 방식은 늘 초조하게 만들것 같습니다 .

제 경우라면 하루, 혹은 주간 단위로 10% 정도를 사회라는 항목을 배정하는데, 블로그 트윗 신문읽기 ,웹서핑등을 여기에 사용하죠. 그런데 한달여 전부터 트윗을 정식으로 시작했으니 블로그나 웹 서핑의 양을 그만큼 줄이는거죠. 뷔페에서 상대가치가 큰 음식을 선택하면 다른걸 줄이듯, 섭취량은 주어져 있는데, 다 취하려고 하면 마음만 초조하고 배탈이 나죠. 트윗의 경우도 이걸 새로 시작하고 하루 30분이 사용된다면 같은 그룹의 분량을 줄여야지 공부나 일 수면을 줄이면 안되죠.

가끔 의미 없이 마우스잡고 시간 보내는 청년들도 많은데 , 이 경우라면 같은 범주에서 대체적 생산성을 찾으면 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산만하게 검색어나 여기저기 연예기사 따라다니지 말고 관심 분야에 집중하면 얻는게 많아질 것 같습니다.


어제 뵌 원로 한분이 제게 하루 몇시간 자느냐고 물으셔서.. '대개 다섯시간은 잡니다..' 라고 말씀 드렸더니, 던지신 한 마디: '음 잠은 많이 자는군.. 한창때 그만큼 자면 충분하지..'

잠 얘기가 나와서 말씀을 더 드리면, 제 경우에는. 최소 다섯 시간은 반드시 자고, 중간에 잠이 모자라는 경우에는 강연 등의 이동 중에 조금씩 눈을 붙입니다. 원래 잠은 사람마다 달라서 획일적으로 기준은 없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숙면의 정도가 중요하고, 그 길이도 사람마다 다른데, 많이 자도 잠이 모자라는 분들은 총량의 문제가 아니라 잠의 집중도의 문제입니다. 물론 적게 자도 가벼운 분들도 마찬가지죠. 이걸 과학적으로 rem 수면같은 사례를 들죠.

그런데 한가지, 저도 부러운건.. 이상하게 성취한 분들중에 잠이 많거나, 늘 졸린다는 분이 드물다는 겁니다. 잠이 적은 사람이 소위 성공하는 걸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후자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한시간을 자도 휴식이 되는 숙면은 찌꺼기가 없는 잠인 것 같습니다. 깨어있는 동안 치열한 시간을 보내는 분들이 그렇다는군요. 그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하루가 혼연일체로 최선을 다한 후에 다가서는 부드러운 요정의 손길이 잠인 셈이죠.

하루종일 고민한 듯 하지만 사실은 망상이 대부분이고, 하루종일 힘들었지만 스스로 후회하며 버리고 미룬 일들이 어깨에 강시처럼 매달려 몸을 무겁게 하죠. 질시와 증오의 감정들도 거기에 무게를 더하고요.

그래서 저는 자기전에 샤워하라, 우유를 마시라, 운동을 하라 등등은 패자의 처방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저도 안되는 일이지만 승자의 처방전인.. 온전한 하루와 완전한 연소를 꿈꾸며, 자극받고 노력하려고 하죠. 하지만 분명 그런분들이 계시더군요.

결론은 잠은 길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얼마를 자건 항상 충분히 쉬었다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이 정돈되어 있어야 한다.. 정도가 되겠네요.. 저도 물론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것이 안되는 일인 입니다..

애써서 시간관리 하기보다 의미 없이 공허하게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창의성을 고민하기보다 망상을 제거하며, 즐거움보다 분심을 버리는 것이 핵심인데 , 이것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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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트는 다른 분들이 쓴 이야기로만 채우게 됐는데,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지요.
제가 지향하는 (잘 되지는 않는) 삶이기도 합니다. 

신이 손을 뻗어 도와주고 싶을 정도로 전념하고,
깨어있는 동안 혼연일체로 최선을 다해서,
완전히 연소되는 온전한 하루를 보내고,
한 시간을 자도 휴식이 되는 찌꺼기가 없는 잠을 잘 수 있는 삶.


이렇게 사는게 후회없는 삶이겠죠.



Posted by ecarus
Scribbles2010. 7. 19. 01:15

제가 존경하는 선배님이 계시는데, 지난 5월 당신의 블로그에 '시간 관념의 상대적 변화'라는 글을 올리신 적이 있습니다. 대한항공 기내 프로그램 중 'Dealing with Time'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쓰신 글인데, 몇 주 후 저도 같은 비행기를 탈 기회가 생겨 일부러 챙겨본 적이 있었죠. "인간의 걸음 속도가 10년 전 보다 10% 빨라졌다"고 하는 내용으로부터 시작해서 시간 관념이 상대적인 것이며,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에 대해 흥미롭게 설명해 줍니다. 다큐멘터리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저로서는 시간에 대한 개념 자체를 곰곰이 생각하게 해준 프로그램이었는데요, 거기서 나온 이야기들과, 그에 대한 제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주: 유튜브를 찾아보니 같은 제목의 동영상이 한 편 올라와 있더군요. 2분짜리 발췌 영상이라 많은 내용이 들어있지는 않습니다만. 참고로 본편에 대한 설명은 iMDb에서도 찾으실 수 있습니다.


"시간은 시계가 아니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영상을 바탕으로 제가 비슷하게 다시 만들어 본 이미지입니다.)


멋진 경치를 바라보며 묘사할 때 미터, 킬로미터, 헥타르 등으로 설명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 눈에 보이는 나무와, 산, 강에 대해 이야기하는게 일반적이고 정상적이죠.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생활이나 삶에 대해 설명할 때에는 '시간'이라는 수치가 자주 등장합니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내 삶이 어때왔는지가 아니라, 나는 몇 살이고, 최근 몇 달 동안 무엇을 했으며, 몇년도부터 몇년도까지 무엇을 했는지 설명하기 십상이죠. 이른바 연대기적 서술이고, 이력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시간에 맞추어 토막을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일까요?  '오늘 하루는 어땠다', '내일은 어때야겠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몇 달 동안 무엇무엇을 이루고 말겠다'고 목표를 세우는 것은 흔히 바람직하다고 여겨지지만,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바람직하기만 한 일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필요 이상의 스트레스를 우리 자신에게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새벽녘으로부터 황혼까지 필요한건 시간(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획일화되고, 경계선이 쳐지고 폐쇄되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부터였다고 합니다. 마치 이윤을 위해 땅에 경계선을 친 것처럼 말이죠. 시간의 경계선이란 몇시까지 출근해야 하고, 퇴근은 몇시 이후, 점심시간과 (이상적인) 취침시간은 몇 시간, 시간 지키기의 중요성 등 하루를 24시간 1,440분으로 나누고 구획마다 할 일을 정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이야 이런 개념이 '효율 제고'로 이해되지만 이런 개념이 도입되던 초기 사람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경계가 없던 들판에 울타리를 두르고 왕래를 제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에 대해 경계선을 세우고 폐쇄하기 시작한 셈이니, 반발의 정도는 어쩌면 우리의 상상 이상이었겠죠.

그러나 시계라는 물건이 종탑에서 책상 위로, 가슴 호주머니로, 그리고 손목을 거쳐 휴대전화로 들어오면서 (즉, 사람들과 점점 가까와지면서) 시간의 지배는 점점 타이트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과 속도에 대한 강박이 점점 심해지고 있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격을 흔히 '빨리빨리'라는 말로 규정짓곤 하는데, 사실 속도지향성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계를 차고 있는 세계 모든 곳에서 점점 심해지는 현상입니다. 

다큐멘터리에서 각국에서 쓰이는 언어를 분석해 본 결과 '천천히', '느리다'는 단어의 동의어들이 대체로 부정적인 것들이 많은 반면, '빠르다'는 단어는 긍정적인 동의어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는군요. 


"바쁨과 성공"

우리끼리 흔히 쓰는 말에서도 이 같은 현상은 뚜렷이 발견됩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주변 사람의 질문에 '한가하다'고 답한다면 '일이 잘 안된다'거나 '일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입니다. 반대로 '눈코뜰새 없다'는 말은 실제 그 사람이 얼마나 삶을 잘 살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어쨌든 잘 지내고 있다'는 의미로 쉽게 받아들여지곤 합니다. 

이건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비즈니스 business'의 어원이 'busy+ness'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Engaged in action'이라는 뜻을 갖고 있지요.) 영어 뿐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이 말은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은 바빠보인다는 거죠. 큰 돈을 벌어야 하니 시간을 쪼개써야 하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니 바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공'일까요? '성공 = 바쁨' 혹은 '바쁨 = 성공'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니라면 바쁨의 동의어, 그리고 성공의 동의어는 무엇일까요? 경제적인 풍요도 좋고, 남들로부터 존중받는 것도 좋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성공은 자기 만족, 자기애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성공은 시간과 큰 관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바쁘다는 말의 올바른 뜻은?"

속도(에 대한 강박)은 깊이있는 것들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합니다. 산과 나무와 바다를 보지 못하고, 거리와 높이, 넓이로만 우리의 시야를 규정하도록 합니다.  

저는 '바쁘다'는 말을 '내가 하는 일을 즐긴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하는 편입니다. 제 일이 지향하는 목표를 알고 저 역시 그를 지향하기 때문에 제가 하는 일은 저 스스로 원하는 일이고, 따라서 제가 하는 일은 저를 즐겁게 하는 거죠. 즐거운 무언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정신이 팔리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외 다른 일에 신경쓸 겨를이 적어지고, 바쁘게 되는 겁니다. (제가 즐기지 않는 일 때문에 정신 없는 경우를 일컬을 때 저는 속어로 '짜친다'는 표현을 쓰지요.^^ '쪼들리다'의 사투리라는데 그보다는 좀 더 구차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표현입니다. 표준어로는 어떤 표현이 맞을지 잘 모르겠네요.) '바쁘다'는 말을 '바빠보이니 성공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느냐'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그는 이미 (1) 바쁨 자체에 의미를 두는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2) 시간의 노예일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시간은 시계가 아니다."

때때로 우리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게 우리를 둘러보고 깊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경치를 바라보며 거리와 높이에 대해 말하지 않고 나무와, 산, 강에 대해 이야기하듯, 우리의 삶 역시 그같은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위해 목표를 세우고, 그를 위해 시간을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구획지어 설명하는 경우가 생길 수는 있겠지만, 필요 이상으로 토막내거나, 우리 자신을 '시한'이라는 틀에 가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속한 조직의 효율적인 운영과 조직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되겠지만, 저는 그것조차 다시 한번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쫓기는 삶이나 쫓는 삶이나 둘 다 팍팍하긴 마찬가지일텐데, 쫓기거나 쫓는 대상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면 몇백 배는 더 팍팍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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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carus
Scribbles2010. 2. 18. 10:22
나이를 먹으면 철이 든다고도 하고..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이 둥글둥글해진다, 혹은 지혜로와진다고도 하시는데..

문득 그런게 좋기만 한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니 매일매일 살면서 조금씩은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을 것이고, 그렇게 받는 영향 때문에 결국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다른 사람들과 비슷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인데요.

말하자면, 살면 살 수록 '인간의 평균형'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이 친구 나이 먹더니 철들었어 (다른 말로, '나와 생각이 비슷해졌어') '라고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과 유사한 것에 호감을 느끼는 법이니까요.


그렇다고 보면 철들었다거나 둥글둥글해졌다는 것은 사실 '본디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 친구 왜 저렇게 튀어?'라는 말을 듣더라도, '저치는 왜 나이를 먹어도 똑같아?'라는 말을 듣더라도, 오히려 좋은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게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매일매일 스스로를 벼리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거겠죠.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항상 가다듬고 있는지, 그냥 남들과 비슷비슷하게 철만 들어가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아침입니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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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carus
Scribbles2010. 1. 3. 18:55

2010년이 된지 3일이나 지난 후에 이런 글을 쓰는게 우습지만, 제 나름대로 어디에든 2009년을 정리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끄적거려 봅니다. 

작년은 정말 다이내믹한 한 해였습니다. 연초에 결혼한 것부터 시작해서, 퇴직, 사업 시작, 이사, 득남까지 모두 2009년 한 해에 일어났으니까요. (차도 팔아치우고, 수입은 재작년 대비 4분의 1로 줄어드는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남들이 한 해에 하나 겪을까 말까 하는 일들을 한꺼번에 몰아쳐서 겪었다며 웃더군요.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다운 일'이라는 생각은 듭니다. ^^

 

Before the sunrise

새로 이사한 집 거실에서 2010년 1월 1일 아침,
새해 첫 해가 뜨기를 기다리며 찍은 사진입니다.
동작대교가 보이는데요, 창문을 닦지 않아 지저분해 보이지만, ^^
벌겋게 밝아오는 하늘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매년 새해를 시작할 때 올 한해는 어떤 한 해가 될지 예상하며 그에 맞는 키워드를 뽑아보곤 합니다. (마치 언론사들이 연말에 그 해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를 정하는 것처럼 말이죠.) 2009년 1월에 예상했던 작년의 키워드는 'Explosion'이었었습니다. 결혼이라는 일도 있었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것이라는 점에서 예전과 크게 다른 폭발적인 변화가 예상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말에 돌이켜보니 작년은 'Explosion'보다는 'Setup'이라는 키워드가 더 어울리는 한 해였던 듯 합니다. 변화는 있었지만 생각만큼 폭발적이지 않았던 것 같고, 오히려 큰 변화들을 세팅하는 과정(setup)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다른 뜻으로, 제 자신이 setup됐다는 것도 있겠구요. ^^)

2010년 올해의 키워드는 'Launch'입니다. 제가 업(業)으로 삼은 business를 처음 launch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으로서 새로운 삶을 launch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 

새해에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사무실 이사입니다. 지금은 양재역 쪽에 있는데 뱅뱅사거리쪽으로 조금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히는 뱅뱅 건물 바로 뒤고, 사무실을 많이 넓혀서 가게 되었으니 발전이라면 발전이겠죠. ^^ 옛말에 사람 사는 집에는 손님들이 많이 드나들어야 복이 흥한다고 하지요. 새로운 집에서 많은 분들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ecarus
Scribbles2009. 9. 1. 15:21

게으름..
단어 자체도 '나른한' 느낌을 줍니다. 어디에선가 늘어져서 만사를 귀찮아하는 듯한..^^

지난 한 달간 꼭 그랬던 것 같아요. 그 전에는 나름대로 맘먹고 열심히 글 쓰다가 어느 한순간 갑자기 모든게 귀찮아진거죠. 목적이 흐릿해져서라고나 할까.. 덕분에 블로그는 물론, Twitter, Facebook 전부 잘 쉬었습니다. (특히 Twitter는 블로깅에는 독인 듯. 아니면 제가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잘 못하는 타입이거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블로그를 시작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
따뜻한 충고의 말씀을 보낸다.
하지 마라.
지금 블로그를 하고 있다면 폐쇄하라.
4년 전만 해도 블로그는 할만했다.
이제 블로그는 더 이상 평범한 이들이
자신을 표현하고 재치를 발휘하는 공간이 아니다."

- 폴 바우틴,
'블로그를 닫아라'(Wired 2008년 11월호 p.28)


어느정도 수긍도 가는 말입니다. 덕분에 사람들 따라서 Posterous에도 가입하고, Whrrl에도 가입해서 사용해보고, 그 외 다른 대안들도 기웃거려보고 했는데, 결국 '쓰는 것'의 본질은 어쨌든 변하지 않더군요. 어디에 쓰든 말입니다.

현재 저에게는 블로그가 그나마 제일 적합한 공간입니다. 한 달 잘 쉬었으니, 이제 다시 집필(!)모드로 돌입해볼까 합니다.



Posted by ecarus
Scribbles2009. 7. 20. 09:27

2003년 10월에 입사해서 2년여 동안 브랜드마케팅연구소에서 일하다가 2006년 1월 조직개편을 맞아 인터랙티브팀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1년 반 정도 옮기고 싶다고 조른(?) 덕분이었죠. 학부는 신문방송학과를 나왔지만 그 이후에는 쭉 온라인 광고부터 시작해서 IPTV까지 인터랙티브 마케팅과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었기 때문에 인터랙티브팀에서도 꼭 일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팀 이름은 '인터랙티브 미디어팀'이었습니다. 소속 본부도 마케팅 본부나 광고 본부가 아니라 매체 본부라는 점 때문에 '혹시 매체 업무만 하게 되는건 아닌지'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제일기획이 원래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 붕괴 이전) 인터넷 본부를 운영했던 전력도 있었고, 비록 2006년 당시에는 본부를 접고 일개 팀 단위로 축소되어 있긴 했지만 온라인 분야의 중요성을 간과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정말 미디어 업무만 하게 되더군요. OTL

이 로고도 제가 마음대로 혼자 만들어서 썼도 인터랙티브 미디어팀 로고입니다.
원본은 Interactive Media Team이라고 돼있는데, 그건 못찾아서 대신.. ^^

 

조직은 조직의 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는걸 크게 느낀 시절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본부가 매체 본부이다보니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관리하는 업무에 중점을 두는 분위기였는데, 팀장 역시 온라인의 '가능성'보다는 주어진 매체 업무에만 초점을 맞추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업무가 '어떤 매체에 얼마 어치 광고를 집행하느냐'에 대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온라인 커뮤니티나 블로그, 어플리케이션 등 '인터랙티브 커뮤니케이션' 자체에 대한 고민은 거의 하지 않게 되는 단점이 생겼죠. (그런데 사실, 그 일만 해도 하루가 벅찰 정도로 바쁘긴 했었습니다. 심지어 당시에는 수수료율이 낮다는 이유로 검색 광고는 대행하지 않았었으니까요.) 오로지 배너 광고 수주와 집행, 그리고 배너가 끌어올 마이크로사이트에 올인하는 구조였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배너광고만 팔면서 살 수는 없으니, 당시 저는 미디어 구매/관리 업무보다 마케팅 업무에 좀더 중점을 두고, 그 쪽 방향으로 후배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교육 기회를 넓히려는 시도를 했었습니다. 당시 팀장의 의견과 달라 마찰도 많이 빚었죠. 대신 좋은, 능력있는 후배들을 많이 알게 되어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인터랙티브 미디어팀으로 옮기고 꼭 1년 후인 2007년 1월, 제일기획은 '글로벌인터랙티브팀'을 신설합니다. 제일기획이 담당하는 해외 광고--99% 삼성전자 광고입니다--를 온라인에서 집행하기 위한 전략을 짜고 실제 집행까지 하는 것, 게다가 삼성전자가 기존에 운영하던 해외 웹사이트를 완전히 뒤집고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업무가 주어졌죠.

말은 간단해 보이지만, 열 군데도 넘는 국가에서의 온라인 전략을 짜는 것도 엄청난 일인데 집행까지 하라는 것은, 팀이 아니라 하나의 회사가 할 일입니다. 게다가 삼성전자의 웹사이트를 만든다는 건 단순한 사이트를 만드는 차원의 일이 아니죠. 수십개국의 사이트를 만들고, 이들이 각각 연결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마케팅, 그리고 아마 판매, 물류관리까지도 연계가 되어야 할테니, 이건 일개 팀이 맡아서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비롯, 단 4명을 그 팀으로 발령을 냈습니다.-_-; 

팀 설립 당시에는 팀장도 공석이었는데, 다음 달에 신임 팀장이 외부에서 스카웃되어왔고, 한 두 명씩 불어나더니 가을에는 30명에 달하는 제일기획 내 최대의 팀이 됐습니다. 30명이 넘어도 사람은 언제나 크게 모자랐죠. 하도 격무에 시달리다보니 업계에 소문이 나서, 안에서는 사람이 모자란데 바깥에서는 지원을 기피하는 현상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8년 봄 제일기획은 인터랙티브 관련 움직임을 더욱 강화, 인터랙티브 사업 추진을 위한 별도의 본부를 구성하기에 이릅니다. 기존에 이미 있던 인터랙티브 미디어팀과 글로벌 인터랙티브팀을 한 곳에 모으고, 국내 인터랙티브팀과 제작팀 등을 신설해 'The i' 라는 조직을 만든거죠. (관련 기사. 공식명칭도 'The i'고 언론 등에도 'The i', '디아이' 등으로 표기됩니다만 안에서는 다들 '아이본부'라고 부릅니다.^^) 같은 해 초에 영문 사명(社名)을 Cheil Communications에서 Cheil Worldwide로 바꾸는 등 글로벌 마케팅에 큰 비중을 두기로 한 데다가, '인터랙티브 분야가 성장동력이다'라고 천명을 해놓은 상태니 글로벌 인터랙티브팀의 어깨가 아무래도 무거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새로 바뀐 제일기획 로고입니다. Cheil 부분은 변화가 없죠.

The i 로고구요. 사람들마다 제각각 다르게 부른다는 점에서, 담고 있는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이 애매하다는 점에서 브랜딩 관점에서는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더군요.


그 팀에서 보낸 2년 반은 정말 여러가지를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광고주들이 많은지 (이건 대행사에 계신 분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실..^^), 외국인 사대주의가 우리나라에 얼마나 팽배해 있는지, 사람의 인성이 실력보다 얼마나 중요한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끼기도 했지만, 가장 큰 배움은 저 자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공부를 아무리 오래 했어도 실전에서의 경험에 비교해 볼 때 그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일 수 있는지.
책 속에 숨어있는 글 외에, 학교에 몸담고 있는 학자들 말고도, 업계에 흩어져 있는 고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나의 지식과 경험은 얼마나 부족한 것인지를 느끼게 된거죠.

이런 걸 깨달을 때마다 동료들과 나누고 함께 공부했어야 하는데, 하루하루의 일에 치여 미래를 준비하는 일은 계속 미뤄왔던 셈이죠. 돌아보면 제가 했던 일들은 '현재를 준비하는' 일이 대부분었던 것 같습니다. 당장 닥친 온라인 캠페인 관련 업무, 팀 내외 교육 준비, 팀 조직 업무 등으로 항상 눈코뜰새 없었죠.

그런 일들 때문에 인터랙티브 마케팅의 전략 기획 업무나 미래를 위한 학습 등 정작 중요한 일에는 소홀했던 것이 가장 아쉽습니다. 앞으로의 청사진을 충분히 그리지 못해 지금 남아있는 후배들이 고생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구요. (그러고 보면 위에서 '조직의 윗사람이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은 제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은 봤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일에 파묻혀 있었다는 점에서는 죄질이 더 나쁘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심지어 사보 표지모델로도 나왔습니다. (2007년 12월호)
영광스런 일이긴 한데, 평생 지우고 싶은 사진이죠.. ^^
사보 나온 이후 다니던 미용실 바꿨습니다.


힘든 시간들도 많았지만 대부분 즐겁고 신나는 날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은 다름아닌 함께 일했던 선후배와 동료들이죠.

거의 6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나와서 제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해왔던 일이 이 바닥 일이다보니, 새로 시작하는 일 역시 같은 일일 수 밖에 없겠죠. 대신 이제는 현재에 파묻히지 않고, 미래를 그려가는 일을 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만 잘 사는 일이 아니라, 남들을 돕고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제가 제일기획에 있을 때 후배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것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ecarus
Scribbles2009. 7. 7. 03:58

위 로고는 지금 쓰는 Cheil Worldwide가 되기 전, Cheil Communications 시절의 로고입니다. ^^


제일기획을 나온지 이제 공식적으로 한 달이 됐습니다. 매일 하던 출근을 안해도 되고, 일요일 밤 괜히 우울해지지 않아도 되고,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은 생각했던 것처럼 색다르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더 좋은 점은 오랫동안 못만났던 사람들을 만나 그간의 불성실함에 용서를 구할 수 있었다는 점이더군요.

반면 항상 때맞춰 나오던 월급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더 많이 고통스러웠습니다. ^^ 삼성전자의 2분기 영업이익이 2조를 넘었다는 뉴스나, 이번달 거의 모든 계열사들이 PI (보너스) 잔치를 벌일거라는 이야기가 더이상 저와는 관계 없는 소식이라는걸 되뇌어야 한다는 사실두요. ㅋㅋ

 

제일기획을 처음 들어간 건 2003년 10월이었습니다. 그해 봄에 학위를 받고 놀다가, 생각보다 일찍 취직을 하게 됐었죠. 공부를 좀 오래 했다는 이유로 (현재는 '커뮤니케이션 연구소'로 간판이 바뀐) 당시 브랜드마케팅연구소에 배치되었습니다. 지금은 마케팅 전략본부장이 되신 상무님이 당시 연구소장으로 계셨고, 지금 연구소장을 맡고 계시는 수석님은 당시 제 셀장님이셨죠.

제가 마음대로 혼자 만들어서 보고서에 쓰기도 했던
브랜드마케팅연구소 로고입니다.

 

출근하고, 첫날 점심을 먹고 당시 팀장님께서 내려주신 첫번째 프로젝트가 '광고 모델 데이터베이스 구축'이었습니다. 알겠다고 말씀은 드려놓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악소리가 났었습니다. 공부만 하던 머리로 생각했던 '광고 모델'은 각종 광고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모형들을 의미하는 거였으니까요. 그런 모형들을 모으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라니, 모형을 만들만큼 다양한 모형이 있느냐는 문제는 차치하고 그런 데이터베이스를 왜 만들어야 하는건지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

그리고 며칠 후 이어지는 팀장님의 부연설명은, 그런 광고모델이 아니라, 광고에 등장하는 모델들, 즉 연예인과 유명인사들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라는 의미였죠. (휴~~!!!)

첫 프로젝트라 특히 의욕에 불탔던 기억이 납니다. 수천 명 유명인사들의 프로필을 모으고, 분류 기준을 만들고, 정리하고, 연예인의 경우 시시각각 바뀌는 출연작 정보를 업데이트해야 하는 등 극도로 노동집약적인 업무가 많았던 관계로 제 밑으로 단기 아르바이트만 10여 명을 뽑아서 회의실 하나를 전세 내서 일했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대리급) 고급 알바 1~2명은 거의 매일 사무실에서 저와 밤을 새가면서 일했었구요. (이 일 때문에 제 사비를 털어 사무실에 라꾸라꾸 침대를 사다놓았던 기억도....)

게다가 유명인사들에 대한 소비자 인식 등을 새롭게 조사해야 했기 때문에 새로운 조사 방법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 큰 일이었습니다. 특히 연예인들의 이미지를 어떻게 수치화할 수 있을 것인지, 어떤 제품 광고에 어울릴 것인지 분석하는 방법이나, 향후 유망주를 남들보다 먼저 발굴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이 관건이었죠.

예를 들면, 현재 김연아 선수가 하우젠 에어컨 광고에 출연 중인데요, '에어컨 = 시원 = 얼음 = 아이스 스케이팅 = 김연아'의 연상 고리는 사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거겠죠, 굳이 무슨무슨 방법론을 쓰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연결고리가 아니라 '하이트 맥주 = *** = *** = 추성훈' 과 같이 좀더 추상적인 연결고리를 짜는 것, 그리고 그것을 소비자들이 공감할 수 있게 돕는 것이 '방법론'을 개발하는 겁니다.

사실, 타 광고 대행사와 조사회사들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하고, 몇몇 회사는 제일기획처럼 방법론을 만들고자 하기도 합니다. (예: 김연아, 광고모델 호감도 115위였는데… - 동아일보 기사) 하지만 대부분 비슷한 딜레마를 갖고 있죠. 바로 '유명한 연예인이 모든 업종 광고에서 높은 선호도를 차지'하는 '지명도의 딜레마'입니다. 이 때문에 이영애 -> 전지현 -> 김태희 -> 김연아로 이어지는 모델 싹쓸이 현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조사를 하든 '이 광고는 전지현이 (혹은 김연아가) 모델을 하면 소비자가 가장 좋아할 것'이라는 결과가 나와버리니까요.

따라서 이런 상황은 광고대행사가 의당 해야 하는 '진정한 광고 모델 분석'에 한계로 작용합니다. 광고주가 대행사에게 돈을 주고 광고모델 분석을 의뢰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톱스타만큼 돈을 안쓰고도 톱스타만큼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모델안 도출', 혹은 '톱스타를 써야한다면 왜, 어떤 기대효과로 써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위해서인데요, 기존에 있던 조사만으로는 항상 김태희, 장동건, 소지섭만 답으로 나올테니까요.

그리고..
이런 딜레마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 개발에 골몰하던 중 이른바 '연예인 X파일' 사건이 터집니다. 2005년 1월 17일의 일이죠.


이제는 사람들이 정말 옛날 이야기처럼 이 단어를 꺼내고, 저도 옛날보다는 상처가 많이 옅어졌지만,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습니다. 등장하는 연예인 분들, 문건에 등장하는 분들만큼은 아니었겠지만, 제 개인사에도 굵은 획을 그은 사건이었죠.

사건의 전말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기승전결은 예전에 발표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위 그림에도 나와있듯) 제일기획이 조사업체와 함께 광고 모델계 (연예계) 전문가 분들을 인터뷰했고, 그 내용의 일부가 왜곡된 채 누군가의 실수로 외부로 유출된 사건인거죠.

하지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사실은, 그 인터뷰 조사는 문건에 등장하는 것 같은 내용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쭉 설명드렸듯, 당시 제일기획은 모델의 장래성(특히 유망주의 경우)을 예측하기 위한 방법론을 개발하는 중이었고, 위 조사의 실제 인터뷰 역시 그런 내용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인터뷰에서 거명된 '장래성 밝은 유망주', 그리고 '주목해야 할 신인과 특기' 등은 여러 사람의 크로스체크를 거쳐 충분히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만 제일기획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이 됐습니다. 그것도 (PPT가 아닌) 단순 텍스트 형태로 말이죠.

하지만 외부에 공개된 이른바 연예인 X파일은 저희가 원치 않는 인터뷰 내용, 즉 사실 관계가 크로스체크되지도 않았고, 인터뷰이(= 전문가분들)가 답변했는지 정확하지도 않은, 주관적, 흥미용 문건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필요없는 문건이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파기해 달라'고 부탁한 문건이었습니다만, 황당한 사건으로 이것이 외부에 알려졌고, 이후에는 들불처럼 퍼져나갔습니다. 제일기획이 필요로 했던 중요 내용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고, 인터뷰를 하신 분들이 하지도 않은 말들까지 포함되고 부풀려져서, 심지어는 받은 사람들이 임의로 수정한 버전까지 더해져서 말이죠. (이 때문에 저는 여러분께서 보셨을 X파일은 아마도 원본과 많이 다른 내용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 때문에 검찰에 몇 차례씩 불려다니고, 팔자에 없던 법 공부를 해가면서 검사와 각을 세우기도 하면서 '아슬아슬한' 상황까지 가는 등 저 개인적으로도 고생을 했습니다만 (검사와 싸웠다니까 다들 미쳤다고 하더군요), 사실 더 가슴아픈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사건 당시, 연예인 분들은 물론, 연예인이 아닌 많은 분들의 실명이 문건에 거론되었었죠. 저는 회사에 속해 있어 외부에 거의 노출되지 않았었지만, 실명이 공개된 분들 중에는 회사를 그만 둔 분도 계시고, 남아계신 분 중에도 분야를 바꾸기도 하시는 등 많은 분들이 큰 고초를 겪으신 것으로 압니다. 게다가 이 건으로 고생한 연예인들까지 생각하면....  이 빚은 어떻게 다 갚나 싶습니다. 그 분들께는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개인적으로 고생한 것보다 이 일 때문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잃었다는 점이 아직도 가슴 한구석 무겁게 남아있습니다. 회사 밖으로도, 안에서도, 심지어 개인적인 관계에서까지도 말이죠. 

사고가 마무리되고, 제일기획은 그와 같은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연예인 X파일 2탄이라는게 (아마도 증권가에서?) 나왔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만 해도 X파일 단어만 들어도 벌떡 일어날 때라.. 굳이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 설명드렸듯, 당시 제일기획은 모델의 성공가능성을 예측하기 위한 방법론을 개발하는 중이었고, 이런 사고를 겪게 된 것도 어쩌면 방법론 개발에 있어 그만큼 별별 고민을 다 해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과 고민이 제일기획의 모델 제안 시스템을 지금처럼 업계 일류로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구요.

 

사고가 모두 마무리된 이후에는 연구소 본연(?)의 브랜딩과 마케팅 컨설팅 업무를 많이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제는 그 때 함께 일했던 분들 중 대부분이 연구소 밖, 혹은 회사 밖에 나가계시는군요. 

2006년 1월에는 연구소를 떠나 인터랙티브팀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원래 전공이 인터랙티브 광고였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올립니다.


Posted by ecarus
Scribbles2009. 6. 26. 15:26

간만의 펌질 하나. chmotors님의 블로그에서 퍼온 글입니다.
술의 기원과 주도(酒道)에 대한 글이 재미있게 설명되어 있네요.

내용이 굉장히 깁니다. 아래는 긴 내용 중 술자리 예절과 술 친구를 가리는 기준에 대한 부분만 발췌를 했구요 (말투는 문어체로 딱딱하지만, 오늘도 곱씹을만한 내용이군요), 기원과 술 문화에 대한 글은 더 밑에 붙였습니다. 원문은 여기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술자리 예절

1. 기뻐서 마실 때는 절제가 있어야 하고,
2. 피로해서 마실 때는 조용해야 하며,
3. 점잖은 자리에서 마실 때에는 소세한 풍조가 있어햐 하고,
4. 난잡한 자리에 마실 때에는 금약이 있어야 한다.
5. 새로 만난 사람과 마실 때에는 한아(閒雅)하게 마셔야 하며,
    (閑은 한가함이 아니라 정숙함, 진솔함을 의미)
6. 잡객들과 마실 때에는 재빨리 꽁무니를 빼야 한다.

 

술 친구를 가리는 기준

1. 말을 잘 하면서도 아첨하지 않는 사람
2. 기백이 약한 듯 해도 어느 한군데에 쏠리지 않는 사람
3. 눈짓으로 하는 주령(酒令, 신호)을 보고 잘못된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 사람
4. 주령이 시행되면 온 좌중에 호응하고 나오는 사람
5. 주령을 들으면 즉시 이해하고 재차 문의하지 않는 사람
6. 고상한 해학을 잘 하는 사람
7. 좋지 않은 술잔(이 경우 여자를 포함)을 차지하고도 아무 말이 없는 사람
8. 술을 받게 되어도 술의 좋고 나쁨을 논하지 않는 사람
9. 술을 들면서 거동에 실수가 없는 사람
10. 아예 만취가 되었어도 술잔을 둘러엎지 않는 사람
11. 제목에 따라 시를 지을 수 있는 사람
12. 술을 이기지 못하면서도 흥취가 밤새도록 만발하는 사람

=-=-=-=-=-=-=-=-=-=-=-=-=-=-=-=-=-=-=-=-=-=-=-=-=-=-=-=-=-=-=-=-=-=-=-=-=-=-=-=-=-=-=-=


술은 인류 역사와 함께 탄생했다. 인류가 목축과 농경을 영위하기 이전인 수렵, 채취 시대에는 과실주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실이나 벌꿀과 같은 당분을 함유하는 액체에 공기 중의 효모가 들어가면 자연적으로 발효하여 알코올을 함유하는 액체가 된다. 원시시대의 술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모두 그러한 형태의 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최초로 술을 빚은 생명체는 사람이 아닌 원숭이로 알려져 있다. 원숭이가 나뭇가지의 갈라진 틈이나 바위의 움푹 패인 곳에 저장해둔 과실이 우연히 발효된 것을 인간이 먹어보고 맛이 좋아 계속 만들어 먹었다. 이 술을 일명 원주(猿酒)라고 한다.

시대별로 주종의 변천을 살펴보면, 수렵, 채취시대의 술은 과실주였고, 유목시대에는 가축의 젖으로 젖술(乳酒)이 만들어졌다. 곡물을 원료로 하는 곡주는 농경시대에 들어와서야 탄생했다. 청주나 맥주와 같은 곡류 양조주는 정착농경이 시작되어 녹말을 당화시키는 기법이 개발된 후에야 가능했다. 소주나 위스키와 같은 증류주는 가장 후대에 와서 제조된 술이다.

술의 원료는 그 나라의 주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술로 만들 수 없는 어패류나 해수(海獸)를 주식으로 하는 에스키모족들은 술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원료가 있다고 하더라도 종교상 금주를 하는 나라의 양조술은 매우 뒤떨어져 있다.


1. 신화속의 술

이집트 신화에 의하면, 이시스 여신의 남편인 오시리스가 보리로 맥주를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오시리스는 누이인 이시스와 결혼을 하고 이집트를 통치한 왕이었으나 동생에게 살해되어 사자(死者) 나라의 왕이 된다. 이 신은 농경의례와 결부되어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보리로 술을 빚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디오니소스가 술의 시조라고 한다. 디오니소스는 로마 신화에서는 주신(酒神) 바커스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술을 뜻하는 명칭인 '박카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생후 6개월만에 어머니 세멜레가 죽자 요정들의 정성으로 양육되었고, 트라키아 지방의 뉘사 산에서 성장했다. 디오니소스는 이 산에서 숲속을 뛰어다니다가 포도를 발견하고 포도주를 처음으로 만들어 냈다고 한다. 뉘사산에서의 수업을 마치고 그리스로 돌아왔을 때, 아티카에 사는 이카리오스란 사람이 그를 환대하였으므로 그에게 선물로 포도나무를 주고 포도주 담그는 법을 일러주었다고 한다. 이카리오스는 기뻐하면서 그 신기한 포도주를 근처의 목동들에게 한 잔씩 권했다. 맛이 좋아 많이 마신 목동들은 술에 취해 눈앞이 아찔아찔해지자 독약을 타먹인 줄 알고 이카리오스를 죽이고 말았다. 최초로 술의 순교자가 된 셈이다. 지금도 그리스의 아티카에서는 '디오니소스제'라는 포도주제가 12월에 거행되고 있다.

인도신화에서는 소마신(蘇麻神)이 감로주를 처음 빚었다고 하는데 이것을 마시면 고뇌를 잊고 장수하며 또 죽은 사람을 부활시킨다고 한다.

구약성서에서는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온 세계의 동식물을 다시 살게 했을 때 그 중 포도의 씨도 들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 때 하나님이 노아에게 포도의 재배법과 포도주 제조법을 일러주었다고 한다. 예수도 가나안의 혼례에 스스로 술을 빚었으며, 최후의 만찬에선 제자와 함께 포도주를 마셨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하(夏)나라의 시조 우왕 때 의적(儀狄)이 처음 곡류로 술을 빚어 왕에게 헌상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후 의적은 주신(酒神)으로 숭배되고 그의 이름은 술의 다른 명칭이 되었다. 또한 진(晉)나라의 강통(江統)은 주고(酒誥)라는 책에서 “술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상황(上皇 : 천지개벽과 함께 태어난 사람) 때부터이고 제녀(帝女) 때 성숙되었다”라고 적어 인류가 탄생하면서부터 술이 만들어졌음을 시사했다.그러나 구체적으로 중국에서 처음 술을 빚기 시작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인 황하문명 때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시기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주기(酒器: 술을 발효시킬 때 사용하거나 술을 담아두던 용기)가 당시 필요한 용기의 26%나 되었을 정도로 술은 이 시기에 일상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의 단군신화에 의하면 단군께서 백성들에게 농사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가을에 햇곡이 나면 높은 산에 올라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햇곡으로 만든 술과 떡, 그리고 소를 잡아서 제물로 썼다고 한다. 이 제사를 신이 가르쳐 준 농사법에 의해서 지은 것이란 뜻에서 신농제(神農祭)라 했으며, 소는 양념을 넣지 않고 국으로 끓여 참배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먹게 했다고 한다. 먹을 때 소금만으로 간을 맞추어 먹게 했으며, 이국을 신농탕(神農湯, 설렁탕의 기원이란 설도 있음)이라고 했고, 햇곡으로 빚은 술을 신농주(神農酒)라 일컬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술인 막걸리라고 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2. 문헌상의 술

중국의 고서 전국책(戰國策:주나라 안왕에서부터 진시황 때까지 2백40여 년 간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는 술에 대한 기록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옛날 황제의 딸 의적이 술을 맛있게 만들어 우왕(하(夏)나라의 왕)에게 올렸더니 우왕이 이를 맛보고는 후세에 반드시 이 술로 나라를 망치는 자가있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술을 끊고 의적을 멀리 하였다."

이 글에서 보면 중국에는 하나라 때인 기원전 약 2천년대에 이미 술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중국의 문헌에는 우왕때에 제후를 소집하여 도산회(塗山會)라는 모임을 가졌을 때 특히 단군의 자손을 초청했다는 것이 있는데, 이는 술을 매개로 정치적인 왕래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헌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고삼국사기이다. 그 중 동명성왕의 건국담 속에 술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하백(河伯)의 세 딸 유화(柳花), 훤화(萱花), 위화(葦花)가 더위를 피해 청하(지금의 압록강)의 웅심연에서 놀고 있었다. 이때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가 세 처녀를 보고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신하를 시켜 가까이하려고 하였으나 그녀들은 응하지 않았다. 그 뒤 해모수는 신하의 말을 듣고 새로 웅장한 궁전을 짓고 그녀들을 초청하였다. 초대에 응한 세 처녀가 술대접을 받고 만취한 후 돌아가려 하자 해모수는 앞을 가로막고 하소연을 하였다. 세 처녀가 놀라 달아났는데, 그 중 유화만이 해모수에게 잡혀 궁전에서 잠을 자게 되어 정이 들고 말
았다. 그 뒤 주몽을 낳게 되었다는 것이 동명성왕의 건국담이다.

이 신화를 통해 술이 아득한 옛날 생성되었음은 알 수 있으나 술을 빚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 그밖에 재료나 방법에는 언급이 없어 어떠한 술이었는진 알 길이 없다.

동양에서 술의 시조가 의적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이것이 한낱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설파한 사람이 이조 광해군 때의 학자 서유거다. 그는 그의 저서 <임원경제> 중 '주례총서(酒禮總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술의 기원으로 말하면 지금 이를 분명히 밝힐 도리는 없으나 글자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를 역사책에서 더듬어 보면 술의 기원에 대해 기술된 것이 있으나 근거가 희박해서 전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고증할 길조차 없어 어느것이 정말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고서에 기재된 것을 보면 술의 연유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보여진다.

    1. 의적이 처음 술을 빚엇다는 것은 우왕 때의 일이며,
    2. <요주천종(堯酒千鍾)>에는 술을 요제(전설상의 황제) 때에 만들었다고 하며,
    3. <신농본초(神農本草)>의 술에 대한 대목에서는 황제 내경(전설상의 황제)이 술을
        다스렸다고 되어 있어 의적이 처음 술을 빚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으며,
    4. 다른 책에는 하늘에 주성(酒星)이 있으니 술을 빚는 것은 하늘이나 땅이 모두 같다고
        하며,
    5. 두강(杜康)이 빚었다고 해서 두강주란 말이 있다는 것이다.

옛 풍습에 음식을 먹을 때는 먼저 술로 제사를 지내 왔지만 누구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인지조차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도 그 기원을 알기는 힘든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전해지는 술의 기원은 애매한 것이며 태고적에 술이 만들어지고 차차 개량되어 온 것으로밖에는 볼 수 없는 셈이다.


3. 우리술의 역사

술의 기원이 인류사회에서 민족의 형성과 더불어 원시시대 이래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하였던 을묘의 일종이라는 견해가 오늘날 지배적으로 대두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삼국사기(古三國史記)>에서 밝혀지고 있는 바와 같이 고구려를 세운 주몽 또는 동명성왕의 건국신화 가운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하백의 큰 딸 유화(柳花)와 인연을 맺는데 술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술의 기원 또한 신화 속에서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삼국 형성기에 이미 전래곡주(傳來穀酒)가 그 바탕을 이루어 예,부여,진한,마한 사회를 비롯하여 고구려에서 제천, 영고, 제귀신 동맹등 제행사(諸行事)에서 주야음주가무(晝夜飮酒歌舞)한 바 있었고 특히 고구려에서는 건국 초기(A.D.28년)에 지주(旨酒)를 만들어 한나라의 요동태수를 물리치는 등 주조기술이 뛰어나 중국인들 사이에 자청선장양(自菁善藏釀)하는 나라로 주목을 받은 바도 있었다.

이 때에 이미 우리나라는 주국(酒麴)과 맥아(麥芽)로 술빚는 방법을 익히고 있었고, 이 주국을 이용하여 곡주를 빚는 기술을 일본 응신 천황때에 백제의 인번등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주조기술이 일본에 이전되엇던 까닭에 후세에 가서 주신으로 추앙을 받은 사례가 일본의 <고사기(古事記)>에서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후기에는 백제의 주조기술이 중국과 대등할 정도로 발전을 보아 <주서(周書)>에는 주(酒) 예문화(醴文化:감주문화)가 중국과 대등하였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주국을 이용하여 청주/탁주가 빚어지고 또 맥아 또는 주국을 이용한 감주가 빚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이 시기에는 신라 청주를 비롯하여 고구려 청주가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의 고하주를 낳게 하였거나 당대의 문사들 사이에서 애상(愛賞)되고 있었다.

통일신라시대로 내려오면 곡주류의 여러 주품들이 개발되기 시작하엿고 상류사회에서는 청주류가 성행되고 있었으며 술은 간장, 된장, 젓갈등과 함께 기본 폐백음식으로 이용되고 있엇을 뿐 아니라 그밖에 고등발효식품들과 함께 양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고려시대로 내려오면 전래의 곡주류 양조법은 그 정착차원을 넘어서 전기(前期)중에 청주류, 탁주류, 중양주류, 재주류(막걸리), 감주류등의 전통적인 주류의 양조기술은 더욱 심화되었고, 과실류등을 혼양하는 혼양주조법이 새로 개발됨과 동시에 약재를 혼양한 약용혼양주조법도 아울러 자리를 잡고 있었고, 재제주류(再製酒類)에 속하는 자주류(煮酒類) 양조기술 또한 정착을 보고 있다. 주국(酒麴)의 종류도 다양화되고 전래의 소맥국(小麥麴) 위주에서 미국(米麴)이 병행되고 있었으며, 미국을 이용한 특별한 술로는 이화주(梨花酒)가 정착되고 있었다.

곡주양조법을 바탕으로 하는 양조기술이 고급화됨에 따라 주조사상 주목할 일은 조선
조까지 전해지고 있었던 유명주품의 명칭이 고려조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고급 청주류로 황금주(黃金酒), 벽향주, 삼해주(三亥酒), 유하주(流霞酒), 춘주(春酒), 녹파주(綠波酒), 구하주(九霞酒)등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청주의 대표로 알려져 왔던 방문주(方文酒:일명 백하주(百霞酒))가 이때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고, 조정에서는 특급 청주류인 청법주(淸法酒)와 선온주가 보편화되고 있었다. 또한 삼중양조법을 바탕으로 한 삼해주, 춘주 등의 개발은 양조기술의 고도화에 따른 소산물의 하나였다.

탁주류 가운데서도 우리나라 고유의 특급탁주로 내외에 알려졌던 이화주(梨花酒)도 이 때에 정착을 본 것이며, 혼탁주류에 속하는 부의주, 녹의주 또한 고려조에서부터 그 맥이 이어진 것이었다. 양용혼양주로 이름난 계주(桂酒), 두주(杜酒), 초주(椒酒), 초백주(椒栢酒), 창포주(菖蒲酒), 애주(艾酒)등이 또한 이때에 자리잡은 술들이고 과실및 화엽입주법(花葉入酒法)을 바탕으로 한 혼양주로는 국화주(菊花酒), 죽엽주(竹葉酒), 백자주(栢子酒), 송주(松酒), 오가피주(五加皮酒)를 비롯하여 포도주가 있었다. 그 밖에도 중탕법을 새로 도입하여 재제주류인 자주류(煮酒類) 또한 고려조에서 비롯된 것들의 하나이다.

고려시대가 마침 곡주양주문화의 성숙기를 맞이하였던 것은 국내적으론 양조기술의 축적의 결과라 할 수 있었겠지만 또 하나의 중요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는 것은 국내적으로 안정세가 유지되고 있었던 반면에 국력의 신장과 더불어 대외적인 교섭이 활발해진 것도 그 원인으로 찾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고려시대 전기중에 유입된 외래주만 보더라도 북방계민족으로부터는 중산주(中山酒)를 비롯한 행인자법주(杏仁煮法酒), 계향어주(桂香御酒) 등 유명 청주 및 약용자주가 유입되고 있었고, 멀리 남만사회로부터는 화주(花酒)란 과실주문화가 흘러오고 있었다.

이와 같이 대외주의 접촉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고려조 후기로 접어들면 이와같은 움직임은 더욱 확산되어 몽고와의 접촉을 통하여 마유주문화를 접수하였고, 중국 원나라를 거쳐 멀리 서역사회의 포도주문화를 수용하기에 이르렀으며, 중국으로부터는 계속 특급 청주류인 상존주(上尊酒), 백주(白酒)등이 유입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 속에서 우리나라 주류사상 중요한계기가 되었던 것은 증류주 문화가 유입되었다는 사실이다.

고려 말엽에 유입된 증류주 문화의 유입경로를 보면 아라기주 문화가 몽고 또는 대식상인을 통하여 충렬왕 초기중에 유입하였고, 뒤이어 원나라와의 교섭이 활발해지는 동안 중국에서 창시된 소주문화가 흘러 들어왔다. 이들 증류주 문화가 유입되자마자 곧바로 이 땅에 증류주 문화가 개화되었고 증류주 문화는 정착과 동시에 급속도로 발전하여 증류법을 바탕으로 한 노주(露酒)가 탄생하였고, 이 증류법을 바탕으로 한 재제주류 또한 속속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에 개발된 것 중 일차증류주로는 노주와 함께 홍로(紅酒)가 있었고 고차증류주로는 감홍로(甘紅露) 등이 있었다.

마침내 고려사회에서는 전래의 양조곡주문화에 증류주문화를 추가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고려사회는 양대주류문화권을 완성함으로써 우리나라 전래의 주품들의 틀이 이 때에 이루어져 그 틀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조선시대로 내려와서도 고려시대까지 마련되었던 주품들의 틀 그대로 이어지는 가운데 전기중에는 양조기술면에서 점차 고급화하는 경향이 뚜렷하여져 상류사회에서는 중양주법을 존중하는 한편 양조원료에 있어서도 갱미(粳米) 위주에서 점미(粘米)로의 전환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때의 우량주로 손꼽던 주품으로는 삼해주를 비롯하여 백하주, 이화주, 백자주, 호도주(胡桃酒), 하향주, 청감주(淸甘酒), 자주(煮酒), 국화주등이 있었다. 특히 고려시대 말엽에 와서 정착되었던 증류주는 조선조에 들어서서 급속도로 파급되어 세종대를 중심으로 노주문화는 점차 국제화 단계로 발전하여 일본, 중국 등으로 소주의 수출과 함께 기술 이전이 병행되고 잇었다.

조선조 후기로 접어들면서는 지방주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비전(秘傳)되고 있었던 지방주품들이 노춝되기 시작하였고, 이때의 유명주 대열데 등록되어 있었던 주품중에는 호산춘, 약산춘(藥山春 서울), 노산춘(魯山春 충청), 벽향주(碧香酒) 평안) 등을 손꼽을 수 있다. 특히 전기까지의 국제화 관계로 치닫고 있었던 증류주는 고급양조주의 술덧까지 소주로 전용되는 기현상을 빚어 서울 공덕동에 자리잡고 있었던 삼해주 술도가에서는 이들 삼해주를 모조리 소주로 고아 내는 술덧으로 애용하였다 하니 증류주에 대한 기호적 변화를 짐작할 만하다. 이와 같이 조선조 후기에 증류법을 이용한 주류 개발의 전성기를 맞이함에 따라 우리나라 주류의 구성도 크게 변화되었다.

증류주는 조선조 후기까지에 발전을 계속했으며, 증류주의 음용(飮用)이 성행되었던 조선조에서는 이를 뒷받침하듯 색다른 일화도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었고, 그 가운데는 고추가 유입된 직후에 소주맛만도 강렬한 터에 한때 소주에다 고춧가루를 타서 마시는 버릇이 성행되었고 이로 인하여 죽거나 병을 앓게 된 사람도 상당히 있었다는 사실도 있다.이 때문에 그의 대응방법으로 본초학 분야에서는 소주독을 다루는 처방과 함께 술에 취하지 않는 방법, 또한 술을 빨리 깨게 하는 처방들이 나타났음은 물론이거니와 소주의 음용법이 등장하게 되었다.

소주를 한잔 마시고 냉수를 한잔 마시는 방법, 또 소주에 얼음을 넣거나 꿀을 타서 마시는 등 오늘날의 서구사회의 칵테일 방식을 무색케 하는 처방이 가사서에서 속출하였다. 그 뿐 아니라 정다산(丁茶山) 같은 사람은 전국의 소주고리(古里)를 모조리 거두어들이기를 조정에 청하였고, 이익 같은 분은 큰 소주도가에서 소비하는 양곡만도 일년의 비용이 수천 두에 달하고 있고 이것은 빈호 10년의 양식에 해당한다 하여 한탄하기도 하였다.

전라, 황해의 이강고와 같은 자주류는 고종 19년 2월에 있었던 한미통산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대표한 전권대사(슈펠트)와 청국사신이 합석한 만찬의 자리에서 우리나라 쪽에서 내놓은 음식으로 전복, 백자(栢子), 구기자차, 약반(藥飯), 조악(助岳), 정과(正果), 원소병(圓小餠), 다식등과 함께 동참되고 이로 인하여 우리나라 음식물에 매혹당했던 일들은 이강고와 같은 전통주가 있었고, 또한 자랑할 줄 아는 주체의식이 있었던 사건이 아닌가 한다.

이와같이 증류주류가 성행되는 가운데서도 한말까지 증류주류와 함께 양조곡주류의 뿌리는 계속 이어졌고 서민사회에서는 상대(上代) 이래 전승을 거듭하였던 속성 재주(막걸리)가 보편화되고 있었지만, 한말에 이르러 개항과 함께 강대국과의 통상협정이 체결되면서 우리나라에는 새로운 외래주의 물결이 물밀듯이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 변화 속에서도 전래주는 그 맥을 이어왔지만, 주조기술의 국제화를 예견하듯 조선조 말기 서유규, 이규경, 최한기 등은 중국계의 유명주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여, 주국의 개선 양조기술의 개량 등 우리나라 전통주의 나아갈 바를 암시적으로 제시하는 등의 노력을 한말까지 끊임없이 이어갔다.


4. 주도

주도란 술을 마실 때의 예의로 '주도' 혹은 주례(酒禮)라고도 한다. 어른을 모시고 술을 마시는 예법에 대해 [소학(小學)]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보인다.

술이 들어오면 자리에서 일어나 주기(酒器)가 놓인 곳으로 가서 절하고 술을 받아야 한다. 감히 제자리에 앉은 채로 어른에게서 술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른이 이를 만류하면 비로소 제자리에 돌아와서 마신다. 어른이 술잔을 들어서 아직도 다 마시지 않았으면 젊은이는 감히마시지 못한다. 어른이 마시고 난 뒤에 마시는 것이 아랫사람의 예의이다.

우리 나라의 사람들은 어른을 모시고 술을 마실 때는 특히 행동을 삼가는데,먼저 어른에게 술잔을 올리고 어른이 술잔을 주시면 반드시 두 손으로 받는다. 또, 어른이 마신 뒤에야 비로소 잔을 비우며, 어른 앞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이므로 돌아앉거나,상체를 뒤로 돌려 마시기도 한다. 술잔을 어른께 드리고 술을 따를 때 도포의 도련이 음식물에 닿을까 보아 왼손 으로 옷을 쥐고 오른손으로 따르는 풍속이생겼다. 이런 예법은 현대 소매가 넓지 않은 양복을 입고 살면서도 왼손으로 오른팔 아래 대고 술을 따르는 풍습으로 남아 있다.

술은 임금에서부터 천만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할 것없이 즐겨 마셨기 때문에 주례(酒禮)는 술과 함께 매우 일찍부터 있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향음(鄕飮)조에 따르면, 고려에서는 이 주례 (酒禮)를 매우 중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잔치 때 신분이 높은 사람은 식탁에 음식을 차려 놓고 의자에 앉아서 술을 마신다. 그러나 신분이 낮으면 좌상(左相)에 음식을 놓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마신다. 잔치에 객이 많으면 좌상을 늘린다. 기혈(器血)은 구리(놋쇠)로 만든 것을 쓰고 어포(魚脯), 육포(肉脯), 생선, 나물 등을 잡연(雜然)하게 늘어놓고 있다. 그리고 주행(酒行)에 절도가 없어서 많이 권하는 것을 예(禮)로 안다. 또, 사소절에는 술이 아무리 독하더라도 눈살을 찌푸리고 못 마땅한 기색을 해서는 안된다 라고 하였다. 또한 술은 빨리 마셔서도 안 되고, 혀로 입술을 빨아서도 안된다고 하였다.

박지원의 양반전에는 술 마실 때 수염까지 빨지 말라 하고 있다. 술을 마셔 얼굴이 붉게 해서도 안 되며, 손으로 찌꺼기를 긁어먹지 말고 혀로 술사발을 핥아서도 안 된다, 남에게 술을 굳이 권하지 말며 어른이 나에게 굳이 권할 때는 아무리 사양해도 안되거든 입술만 적시는 것이 좋다고 적고있다.

남에게 술을 따를 때는 술잔에 가득 부어야 하며, '술은 술잔에 차야 맛'이라고 하는 말이 지금도 쓰인다. 그래서 '술은 차야 맛'이라 할 때는 술을 차게 해서 마시는 것이 좋다는 뜻도 되고, 술은 술잔에 가득 차야 된다는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술은 차야 맛이고 임은 품안에 들어야 맛'이라는 속담도 이런 데서 생긴 것이다.


5. 동양의 주도

모두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네 주도에서는 상대편에게 먼저 술잔을 권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그것은 오랜만에 만난 벗에게 보이는 우정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곰 다르다. 술잔을 권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없지만, 실로 코딱지만한 잔으로 병아리 눈물 정도의 술을 홀짝홀짝 받아 마시가란 감질이 날 지경. 그리하여 간에 기별이 가기까지는 밤 새워 마셔도 오히려 부족할 판국이다.

중국에서는 아예 술잔을 권하는 법이 없다. 그들의 주도에 따르면 상대편에게 잔을 권하는 것은 예를 잃는 것이 된다. 각자 자기 잔에 술이 가득 부어지면 잔을 들어올려 '건배'를 하고, 또 술을 마신 뒤에도 자기 잔은 자기 앞에 놓아야 하는데, '건배'의 말이 오가면 잔에 담긴 술은 남김없이 쭉 들이켜야 한다. 때로 조금만 마시고 싶을 경우에는 '스위' (조금만이라는 뜻이라든가?)라는 말로 양해를 구하고 서로가 약간씩 마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도에 한가지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면, 그것은 술을 들 때, 아니 들고 싶을 때 자기 혼자 들이켜는 것이 아니라 꼭 상대편과 함께 들자고 권하는 인사말이다. 인사말이라야 방금 말한 바 '간뻬이'나 스위' 둘 중의 어느 하나이겠지만, 그 인사말에는 우리는 어딘지 모르게 대륙적인 기질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6. 일본의 주도

일본식의 안주는 한마디로 말해서 빛깔의 안주요, 술상에 공식처럼 올르는 것은 생선회이다. 그 생선회도 가지가지. 넓은 접시에 울긋불긋 야채류를 올려놓은 그 솜씨는 마치 '먹는 예술품'을 보는 듯하다. 솔직히 말해서 일본식 안주는 안주 그 자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빛깔을 먹는다는 편이 실감이 가는 표현일는지 모른다.

일본 민족은 원래 색을 즐기는 민족인 성싶다. 술상에 같이 앉는 여색(女色) 또한 빛깔로 단장한 의상이다. 그 '기모노'부터가 그렇다. 색으로 단장한 '기모노'를 앉혀 놓고, 갖가지 색의 안주를 든다는 것은 마치 색을 감상하면서 빛깔을 먹는 일과 다름이없다.

색이라는 것은 본래 솔직담백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색은 오래가면 퇴색하기 마련이다.
쌈빡한 맛은 있지만 오래 두고 음미할 것은 못 된다. 이러한 의미로 본다면 일본인들이 색을 즐긴다는 것은 그것이 곧 그들의 민족성과도 어떤 면에서 일맥상통한 점이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가만히 보면 일본인들의 빛깔의 의미, 그것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솔직담백한 기질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말하자면 왜어(倭語)로 '앗사리'하다는 얘기가 되겠는데, 그 '앗
사리'하다는 것은 빛깔로 말하자면 원색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의 복고정신을 부르짖다가 제 뜻대로 안 된다고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끼오 같은 기질이 바로 그러한 기질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한편 그 솔직담백한 기질은 일단 이해관계가 계속되면 점차 퇴색되어 가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한 현상은 지나간 한일관계사만 보더라도능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그렇게 좋던 우정도 한번 금이 가면 그 무사도 정신이라든가 뭐라든가 하는 그런 정신으로 한칼에 우정을 끊는 예를 우리는 일본의 역사소설에서 흔히 접하게 된다. 그것은 결국 빛깔이 퇴색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아닐지 모르겠다.

더욱이 일본식 술은 여인들의 애교 바람에 넘어가는 술이다. 빛깔로 점철된 안주는 먹는 것이 아닌 보는 안주요, 술은 영딘들의 애교맛에 저절로 목구멍을 넘어가는 술이고 보면, 그네들에 있어서는 안주야말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고, 그리하여 실제로 애교, 그것은 곧 안주가 되어 있는 것이다.


7. 중국의 주도

일본 술이 빛깔과 애교의 술이라고 한다면 중국의 술은 요리와 정(情)의 술이다. 술상에 나오는 요리만도 열 가지가 넘는다. 그것도 우리처럼 한 상에 모두 차려놓고 이것저것 제 맘대로 먹는 안주가 아니라 한 가지씩 차례차례로 들여오는 안주요, 원탁을 돌려가며 나누어 먹는 정다운 안주인 것이다. 요리하면 중국을 연상케 한다더니, 이 말에 그리 큰 거짓은 없을 성싶다. 어느 안주를 입에 넣어도 별미요, 다음에 나올 요리의 별미를 기다리는 바람에 더욱 마시게 되는 술이다. 때문에 안주는 맛만 보고 넘겨야 한다. 한 가지 안주를 한꺼번에 먹고 나면 다음 안주의 맛은 놓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배가 불러서 다음 안주는 거들떠보기조차 싫어지게 된다.

중국인들의 주량은 또한 대단하지만, 거긋이 일면 대도와 자연을 터득키 위한 그들의 대륙적 기질과 통하는 일면일지도 모른다. 비록 내일 삼수감산(三水甲山)을 갈망정 오늘의 이 술좌석만은 충분히 즐기려 하고 주빈(主賓)에게 그러한 즐거움을 흠뻑 맛보여 주려는 성의가 엿보이는 술이기도 한 것이다.

그에 비하면 서양은 자기 것을 스스로가 따라 마시는 술,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철두철미 에고이즘이 낳은 주도이기도 하다. 주도 또한 풍류라는데, 그 메마른 자작(自酌)의 술에 무슨 풍류가 있으며 인간의 정이 오갈 것인가. 서양식 자작의 주도는 결국 개인주의를 낳았고, 그 개인주의는 곧 오늘의 비인간화라는 비극을 낳고 말지 않았는가. 정으로 통하는 인간화에는 동양의 주도가 그 한몫을 할 것같이 생각된다.


8. 음주문화 (1) 독일

파리의 유명한 술집 '해리즈 뉴욕 바'에 걸려 있는 글귀 속에 서양인의 음주관이 잘 나타나 있다.

"걱정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당신이 성공할 것이냐, 성공하지 못할 것이냐이다.
성공할 것이라면 걱정할 까닭이 없다.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면 당신의 걱정은 두 가지다. 건강이 유지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병들 것이냐.
건강할 수 있다면 걱정할 까닭이 없다. 만일 당신이 병들었다면 걱정할 것은 또 다시 두 가지가 된다. 회생할 것이냐, 죽어 버릴 것이냐.
회생한다면 무슨 걱정이랴. 당신이 죽는다고 치면 또다시 걱정 거리는 또 다시 두 가지이다. 천당에 갈 것이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냐.
천당에 간다면 걱정할 것이 없고, 지옥에 떨어진다면 그 곳에 먼저 가 있을 당신의 옛 술친구들과 악수를 하기 바빠 걱정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이다."


맥주의 나라 독일은 음주가 생활의 일부다. 맥주가 이들의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0세기쯤. 그러니까 천 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맥주를 마신 역사가 오래된 만큼 독일인의 술문화 또한 상당히 성숙됐다고 볼 수 있다. 성숙된 독일의 음주 문화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음주는 대화를 즐기기 위한 하나의 도구다. 라인강변에 자리자고 있는 쾰른과 뒤셀도르프의 술집 거리는 주말이면 새벽 2시까지 흥청거린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취흥이 도도해져도 결코 고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맥주는 대회를 윤기있게 하는 촉매제 역할만을 하는 것이다.

둘째, 음주는 하되 법 테두리를 지킨다. 독일에는 곳곳에 비어가르텐으로 불리는 맥주집이 산재해 있고 주택가에도 술집이 자리잡고 있다. 이 맥주집들이 아무런 문제없이 영업을 하는 데는 사생활 보호를 위해 밤 10시 반 이후에는 옥외에서는 술을 팔지 못하도록 하는 엄격한 법이 있고 이를 업주들이 철저히 지킨다는 것이다. 주택가의 비어카르텐이 인기를 끄는 데는 음주운전을 피하려는 독일인들의 지혜도 배어 있다. 독일인들은 요즘 술자리가 있는 날이면 으레 순번을 정해 그 날의 운전자 한 명을 정하고 이 운전자는 술자리에서 대화만 즐기되 음주는 거의 하지 않는다. 엄격한 독일 경찰의 법집행과 그에 걸맞는 독일인의 합리적인 음주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셋째, 더치페이로 음주량을 조절한다. 독일의 맥주는 유난히 구수하고 맛이 좋다. 16세기에 제정된 독일 특유의 맥주 순수법에 따라 맥주보리에다 호프와 효모, 물만으로 맥주를 숙성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번 마시게 되면 구수한 맛에 빠져 폭음하게 될 것 같은데 현실은 다르다. 독일의 술집에서는 술값 계산을 치사하게(?) 각자 해야 한다. 따라서 남에게 술을 강요하고 싶으면 자기가 술을 사야만 한다. 자연히 강권이나 폭음하는 술자리는 거의 없고 주량은 스스로의 주머니 사정에 따라 절제될 수밖에 없다. 뮌헨의 10월 축제를 보면 보름 동안 7백만 명이라는 대규모 인파가 전세계에서 몰려와 독일의 맥주만을 위해 축제를 벌인다.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고 얘기하고 싶은 만큼 얘기한다. 그러나 불상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9. 음주문화 (2) 미국

자유의 나라라고 알려져 있는 미국이지만 술에 관한 한 무한정 자유로울 것으로 생각했다간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미국에서는 기본적으로 옥외에서는 술을 마실 수 없다. 미국에 사는 교민들이 가끔 야유회를 하면서 술을 마시다 미국 경찰에 단속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진다. 

운동경기장에 술을 갖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옥외에서 술 마시는데 대한 규제가 엄격하다 보니 심지어는 알코올 중독자들도 거리에서 술을 마실 때는 술 병을 종이 봉투에 감춘 채 몰래 마실 정도다.

술 판매 제도도 매우 엄격해서 지정 업소 이외에서는 술 판매가 금지되어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구멍가게 체인인 세븐일레븐에서도 빵과 음료수 등의 생필품 외에 술은 팔지 않는다. 술을 판매하려면 우선 주정부나 시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대부분의 주에서는 신규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다만 술 판매권을 반납한 업소가 있을 경우에 한하여 한정적으로 주류 판매허가를 내주고 있어서 술 판매소는 늘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는 허가 없으면 팔 수 없기 때문에 단골 식당이라 해도 술을 팔지 않는 곳이라면 술을 먹고 싶을 때는 손님이 직접 갖고 가서 먹어야 한다. 술 판매 허가가 있다고 해도 언제나 파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일요일에는 술을 팔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다. 일요일에 집에 손님을 초대해 파티를 열 경우라면 토요일에 미리 술을 사두어야 한다.

미국인들의 음주 행태를 보면 우리와 너무도 다른 면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선 주량을 봐도 한국인들보다 훨씬 적게 마신다. 물론 양주가 우리나라 소주에 비하면 독하기는 하지만, 한국인들끼리 양주 한 병을 놓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마시는 것을 보면 미국인들은 혀를 내두른다.

한국의 남자 직장인들이 퇴근해서 각종 술자리를 갖는 것에 비해 미국인들은 곧바로 헬스클럽에 들르거나 집 근처 공원에서 조깅을 하면서 건강을 다진다. 남자들끼리 몰려 다니는 경우는 드물고 술자리 사교 모임엔 부부동반이 상식이다. 남편들은 일찍 집으로 들어가 부인을 도와 저녁 준비를 하거나 설거지를 거들거나 하지 않으면 언제든 이혼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아무 곳에서나 술을 살 수 있고,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술을 마실 수 있으며 맘껏 취할 수 있고 술 때문에 벌인 실수도 적당히 양해가 되는 한국의 음주문화. 술에 관한 한 한국은 가히 지상천국이 아닌가? 미국의 음주문화는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더라도 서로 잔을 권하거나 2차를 가는 일이 거의 없고 취해서 비틀거릴 정도로 마시는 사람도 드물다.술값도 특정인이 사겠다고 선언하지 않는 한 각자 계산한다. 뉴욕 술집에서는 대부분 '해피 아워(happy hour)'라는걸 설정해 오후 5시반부터 1∼2시간동안 운영한다. 이 시간에는 술값을 절반으로 깎아주거나 간단한 안주를 무료로 제공한다.


10. 음주문화 (3) 스코틀랜드

오후 두 시. 술의 고장답게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의 술집들은 대낮부터 발 디딜 틈도 없다. 시끄러운 음악과 떠드는 소리는 우리나라 술집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곧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들의 음주 습관을 발견할 수 있는데, 술을 마시러 온 것인지 수다를 떨기 위해 온 것인지 구분이 안된다는 점이다. 안주 없이 맥주 한 병, 그리고 평균 두 시간씩 있는다. 남자고 여자고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수다만 떨고 있다. 진열대엔 위스키가 수두룩한데 위스키 마시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간혹 나이든 사람들이 향수에 젖어 위스키를 찾을 뿐이다.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나 온더락스로 마시는 사람도 없다. 물에 타 홀짝일 뿐이다. 역시 한 잔을 마시는데 최소한 한 시간이다. "하룻밤에 10잔 정도 마시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엄청난 술꾼이나 그렇게 마신다." 술집 주인의 말이다.

아무리 여러 명이 와도 술을 병으로 주문하는 법은 없다. 그렇게는 팔지도 않는다. 위스키와 맥주를 섞어 마시는 폭탄주는 상상도 못한다. '치샤'라고 위스키 한 모금에 맥주 한 모금 마시는 음주법이 있긴 하지만, 이젠 옛날 이야기다. 스코틀랜드는 북쪽에 위치해 여름이면 밤 11시가 되어야 날이 어두워진다. 밤 12시가 지나 집에 돌아갈 때도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취하게 마시질 않으니 모두 차를 몰고 집에 가도 음주 운전 사고는 거의 없다. 교통 경찰이 순찰을 돌지만 술집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음주측정을 하는 경우는 없단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대학가 카페에도 칵테일이나 맥주가 주종이다. 최근에는 보드카가 인기지만 역시 칵테일로 마시기 때문에 알코올 농도는 매우 낮다.

맥주나 칵테일은 일상화됐지만 위스키는 거의 마시지 않는다. 오히려 위스키 회사들이 걱정할 정도다. 위스키를 마셔도 2년 산, 5년산을 가장 많이 마신다. 12년산 이상이면 프리미엄급으로 분류되어 가격도 비싸고 특별한 날에만 마신다고 한다. 하룻밤에 위스키를 한 병 이상 마셔대고 12년산 위스키를 '싸구려' 취급하는 우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음주 문화임에 틀림없다.


11. 음주문화 (4) 일본

일본의 직장인들이 찾는 대표적인 선술집은 '술이 있는 곳' 이라는 뜻의 이자카야(居酒屋)다. 이런 대중적인 술집은 문 앞에 빨간 종이등(아카초칭-赤提燈)을 내걸어서 눈에 잘 띈다. 큰 길가에 있는 이자카야 '무사시보'는 직장인들이 즐겨 찾는 보편적인 선술집으로 생맥주 한 잔에 4백엔, 간단한 안주 한 접시에 7∼8백엔을 받는다. 모듬 생선회도 한 접시에 1천엔을 넘지 않는다. 절대로 남길 정도는 나오지 않는다. 우리네 눈으로 보면 양이 적겠지만 대신 싸고 깔끔하다.

직장 동료들끼리 모여 술잔을 기울이지만, 술잔을 돌리거나 못한다는 술을 강요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각자 자기가 즐기고 술을 시켜 주량 만큼만 마신다. 같이 온 일행 동료끼리 각각 다른 종류의 술을 놓고 마시는 모습은 쉽게 눈에 띈다. 그러면서 상대방이 조금 마시고 아직 바닥이 드러나지 않은 술잔에 상대방이 시킨 술을 따라서 늘 가득 하도록 해 놓는다. 이른바 첨잔 방식이 일본식 주법이다.

술자리는 보통 한 시간이나 길어야 두 시간 정도. 다음 날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정도만 마시는 경우가 보통이다. 집들이 멀어서 마지막 전차를 놓치면 큰일난다는 현실적인 인식들도 작용한다. 각자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많이 시키지도 않는다. 따라서 일본의 선술집에서 큰소리를 내거나 취해서 주정하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무엇보다 꺼려하는 문화 속에서 형성된 술집 풍속도다. 이런 모습은 술값을 치를 때도 그대로 나타난다. '와리깡'이라고 해서 일행이 똑같이 나눠 내거나 자기가 시켜서 먹고 마신 것에 대한 값만 내는 것이 보통이다. 언뜻 야박하게도 보이지만 역시 남에게 신세지기를 삼가고 분수를 지키려는 일본인들의 합리성이 엿보인다. 주머니 사정에도 건강에도 큰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일본의 음주문화다.


12. 음주문화 (5) 중국

중국에는 모두 4,500여 종의 술이 생산되고 있고, 이 가운데 명주 칭호를 받는 술로는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마오타이, 죽엽청주, 오량액을 비롯해 8가지가 있다. 이들 명주의 공통된 특징은 모두 45도 이상의 독한 술로 좋은 물과 양질의 고량을 원료로 하는 순곡주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같은 명주는 대부분 가짜가 많고 비싸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우리나라의 고량주와 비슷한 바이지우(白酒)를 즐긴다. 백주는 중국인들에게 일상적인 음료수일 뿐 아니라 주요한 교제 수단으로 취급되고 있다. 또한 중국 역사상 영웅 호걸들은 대부분 술을 엄청나게 즐기는 호주가로 묘사돼 있으며, 따라서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도 술을 마시는 것이 큰 자랑거리로 여겨지는 경향이 아직 남아 있다.

또 중국에서는 공적이건 사적인 일이건 대부분 술자리에서 결정되며 특히 사업상 상담 책임자가 술이 약할 경우, 우리의 술상무라고 할만한 陪酒員을 동반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러한 음주관습 때문에 중국의 술 산업은 매년 급성장을 보이고 있으며, 현재 전국에 4 만 여 개의 술 공장이 가동 중이다.

백주는 대부분 쌀이나 보리, 옥수수 등 곡식을 주원료로 제조되고 백주를 만드는 곡식은 연간 1,432만 톤으로 집계되는데 이는 1,100만 인구의 북경 시민 전체가 3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엄청난 분량이다. 이에 따라 이제 막 식량 자급 자족을 이룬 중국은 식량 절약과 국민건강 보호 차원에서 백주 덜 마시기 운동과, 도수가 훨씬 낮은 과일주나 맥주를 마실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포도주 소비가 점차 늘어나고 젊은이들은 맥주를 선호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또 반부패 투쟁의 명분으로 근무 시간 중 백주 금주운동을 동시에 전개하고 있다. 공금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습관화된 중국 관리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이지만 이것도 점차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같다. 오찬 석상이든 만찬 석상이든 어디에서든지 공직자들의 행사에서 맥주나 과실주 외에 백주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식량 절약, 건강 보호, 반부패 투쟁이라는 3대 목표를 내걸고 시작한 독한 술 덜 마시기 운동은 점차 전 인민들의 호응을 얻어가고 있다

술은 반드시 식사할 때 반주형식으로 곁들이고 손님 접대시는 물론 친구들과 어울릴 때 빠져선 안되는 것이다. 즐겨 마시는 술은 맥주이지만 대취할 때까지 마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손님을 초청한 경우 술을 많이 마시도록 권하지만 초대한 손님이 술을 피하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받아들인다.


* 술자리 예절

1. 기뻐서 마실 때는 절제
2. 피로해서 마실 때는 조용하게!
3. 점잖은 자리에서 마실 때에는 소세한 풍조가 있게
4. 난잡한 자리에 마실 때에는 금약이 있게
5. 새로 만난 사람과 마실 때에는 한아(閒雅) (閑은 한가함이 아니라 정숙함, 진솔함을 뜻한다.)
6. 마지막으로 잡객들과 마실 때에는 재빨리 꽁무니를 빼야한다.

이 여섯가지의 심득률(心得律)은 바로 자리의 분위기, 또는 몸의 컨디션을 가리는 중
요한 명심사항이다

* 술친구

1. 말을 잘하면서도 아첨하지 않는 사람
2. 기백이 약한 듯 하면서도 어느 한군데에 솔리지 않는 사람
3. 눈짓으로 하는 주령(酒令, 신호를 의미)을 보고 잘못된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 사람
4. 주령이 시행되면 온 좌중에 호응하고 나오는 사람
5. 주령을 들으면 즉시 이해하고 재차 문의하지 않는 사람
6. 고상한 해학을 잘 하는 사람
7. 좋지 않은 술잔(이 경우 여자를 포함)을 차지하고도 아무 말이 없는 사람
8. 술을 받게 되어도 술의 좋고 나쁨을 논하지 않는 사람
9. 술을 들면서 거동에 실수가 없는 사람
10. 아예 만취가 되었어도 술잔을 둘러엎지 않는 사람
11. 제목에 따라 시를 지을 수 있는 사람
12. 술을 이기지 못하면서도 홓취가 밤새도록 만발하는 사람


Posted by ecarus
Scribbles2009. 6. 6. 11:51

누구나 화장실이 급해서 생긴 재미있는 에피소드 한 두 개 씩은 갖고있게 마련이죠. (물론, 당시에는 절대 재미있지 않았던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TV를 봐도 연예인들이 하는 재미있는 경험 중 가장 '빵 터지는' 이야기는 대체로 화장실이거나 군대 이야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웠던 시절의 자기도 경험했음직한 이야기에 가장 공감하게 마련이니까요 ^^)  

주차장처럼 꽉 막힌 고속도로, 난데없이 미친듯이 배가 아플 때.. 생각만해도 끔찍하죠. 이럴 때 난 어떻게 했다는 이야기... TV 프로그램에서 한두번쯤 들어보신 적 있죠? ^^ (내가 아니라 우리 매니저가.. 우리 코디가.. 이런 이야기 ^^)  대부분은 고속도로 옆길로 뛰어내려가서.. 탁 트인 공간이지만 어쩔 수 없이 일을 치렀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요. (아주 드물게는 차 안에서 해결했다는 이야기도 기억납니다만..) 뭐 어쨌거나 남 얘기건 내 얘기건 간에 상상만 해도 근육이 오므라드는 상황입니다.. ^^

이런 경우를 비교적 덜 창피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주는 솔루션이 있더군요. 저는 처음 봤습니다만.. ^^ 휴대용 화장실입니다!!

보시다시피 휴대에 편리하도록 '하드보드'형입니다. (위 그림은 6개를 한꺼번에 묶어놓은 그림입니다.) 정식 제품명은 'GottaGoToilet™'입니다. ^^ 

낱개를 뜯으면 아래와 같은 그림이 됩니다. 처음에는 평평한 모습이지만 박스를 펼치고 앉을 수 있게 만들면 등받이까지 있는 변기 모양이 완성됩니다. 그리고 오른쪽과 같은 검은 플라스틱 (비닐) 봉지를 넣고 일을 치르면 됩니다. 간단하죠? 일이 끝나신 후에는 비닐봉지만 버리시고, 박스는 다음을 위해 재활용할 수 있구요.


전혀 물을 사용하지 않으니까 번거롭지 않고, 순식간에 설치가 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는 단 1초도 큰 차이를 만들 수 있지요..) 게다가 더 기특한 점은 이 봉지 안에 미리 들어있는 'ChemiSan'이라는 파우더입니다. 이 위에 일을 보게 되는데 이 파우더에 들어있는 성분(상세 성분은 특허로 보호되고 있는 내용이라 공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이 '일 덩어리'의 향기를 수 시간 내로 완전 없애줄 뿐 아니라 며칠 내로 깨끗이 분해도 해준답니다. 게다가 이 봉지 자체도 자연분해되는 친환경 플라스틱이기 때문에, 일을 보고 난 뒤에 집에 가져가셔서 분리수거를 하셔도 되고, 혹은 고속도로변 근처의 쓰레기장을 찾아서 버리셔도 된다는 거죠. ^^ (일 보고 그냥 두고 오시는건 반칙...)

만든 곳은 ChemiSan이라는 업체입니다. (사이트는 여기를 클릭.) 자세한 정보를 원하신다면 사이트를 가보셔도 되지만, 간략히 요약해 드리자면....

        - 무게:  0.9 kg
        - 124 kg까지 지탱 가능
        - 비닐 봉지만 별도 구매 가능
        - 가격:  $29.99 (박스 한 개, 비닐 봉지 8개)

고속도로변에서 저걸 펴고, 위에 앉아 일보시는게 불편하시다면... (1) 저런 것도 없이 그냥 맨 땅에 앉아있는 자신을 상상해 보시거나, (2) 모르는 척 신문이라도 읽으시거나, (3) 이 업체에서 제공하는 "OntheGo Privacy Hut"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변기 주위로 설치할 수 있는 작은 텐트 쯤으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가격은 $54.99이군요. 거의 7만원 돈이니, 얼굴이 많이 알려진 연예인들이 쓰면 될 듯 합니다. ^^

 

 

제 블로그 주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내용인데 저도 왜 제가 난데없이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연히 발견하곤 처음에는 재미있어서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보니 거의 광고 포스트처럼 됐군요. 참고로 저는 위 제품이나 회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답니다. ^^

호기심으로 우리나라에서 파는 휴대용 변기, 휴대용 화장실을 찾아봤습니다. 대부분 환자용, 혹은 공원 같은 곳에 설치하는 간이 화장실들이더군요. 그나마 비슷한 걸 찾은게 아래 그림같은 변기입니다.


일단 외양은 위에서 제가 소개한(?) 것보다는 100만배쯤 깔끔합니다만, 역시 휴대성이 떨어질듯 합니다.. ^^

더 좋은 변기 있으면 공유해 주세요.. ^^


Posted by eca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