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ibbles2010. 7. 19. 01:15

제가 존경하는 선배님이 계시는데, 지난 5월 당신의 블로그에 '시간 관념의 상대적 변화'라는 글을 올리신 적이 있습니다. 대한항공 기내 프로그램 중 'Dealing with Time'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쓰신 글인데, 몇 주 후 저도 같은 비행기를 탈 기회가 생겨 일부러 챙겨본 적이 있었죠. "인간의 걸음 속도가 10년 전 보다 10% 빨라졌다"고 하는 내용으로부터 시작해서 시간 관념이 상대적인 것이며,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에 대해 흥미롭게 설명해 줍니다. 다큐멘터리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저로서는 시간에 대한 개념 자체를 곰곰이 생각하게 해준 프로그램이었는데요, 거기서 나온 이야기들과, 그에 대한 제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주: 유튜브를 찾아보니 같은 제목의 동영상이 한 편 올라와 있더군요. 2분짜리 발췌 영상이라 많은 내용이 들어있지는 않습니다만. 참고로 본편에 대한 설명은 iMDb에서도 찾으실 수 있습니다.


"시간은 시계가 아니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영상을 바탕으로 제가 비슷하게 다시 만들어 본 이미지입니다.)


멋진 경치를 바라보며 묘사할 때 미터, 킬로미터, 헥타르 등으로 설명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 눈에 보이는 나무와, 산, 강에 대해 이야기하는게 일반적이고 정상적이죠.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생활이나 삶에 대해 설명할 때에는 '시간'이라는 수치가 자주 등장합니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내 삶이 어때왔는지가 아니라, 나는 몇 살이고, 최근 몇 달 동안 무엇을 했으며, 몇년도부터 몇년도까지 무엇을 했는지 설명하기 십상이죠. 이른바 연대기적 서술이고, 이력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어쩌면 필요 이상으로 시간에 맞추어 토막을 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일까요?  '오늘 하루는 어땠다', '내일은 어때야겠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몇 달 동안 무엇무엇을 이루고 말겠다'고 목표를 세우는 것은 흔히 바람직하다고 여겨지지만,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바람직하기만 한 일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필요 이상의 스트레스를 우리 자신에게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새벽녘으로부터 황혼까지 필요한건 시간(이 아니라) 그 이상이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획일화되고, 경계선이 쳐지고 폐쇄되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부터였다고 합니다. 마치 이윤을 위해 땅에 경계선을 친 것처럼 말이죠. 시간의 경계선이란 몇시까지 출근해야 하고, 퇴근은 몇시 이후, 점심시간과 (이상적인) 취침시간은 몇 시간, 시간 지키기의 중요성 등 하루를 24시간 1,440분으로 나누고 구획마다 할 일을 정하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이야 이런 개념이 '효율 제고'로 이해되지만 이런 개념이 도입되던 초기 사람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경계가 없던 들판에 울타리를 두르고 왕래를 제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에 대해 경계선을 세우고 폐쇄하기 시작한 셈이니, 반발의 정도는 어쩌면 우리의 상상 이상이었겠죠.

그러나 시계라는 물건이 종탑에서 책상 위로, 가슴 호주머니로, 그리고 손목을 거쳐 휴대전화로 들어오면서 (즉, 사람들과 점점 가까와지면서) 시간의 지배는 점점 타이트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과 속도에 대한 강박이 점점 심해지고 있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격을 흔히 '빨리빨리'라는 말로 규정짓곤 하는데, 사실 속도지향성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계를 차고 있는 세계 모든 곳에서 점점 심해지는 현상입니다. 

다큐멘터리에서 각국에서 쓰이는 언어를 분석해 본 결과 '천천히', '느리다'는 단어의 동의어들이 대체로 부정적인 것들이 많은 반면, '빠르다'는 단어는 긍정적인 동의어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는군요. 


"바쁨과 성공"

우리끼리 흔히 쓰는 말에서도 이 같은 현상은 뚜렷이 발견됩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주변 사람의 질문에 '한가하다'고 답한다면 '일이 잘 안된다'거나 '일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십상입니다. 반대로 '눈코뜰새 없다'는 말은 실제 그 사람이 얼마나 삶을 잘 살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어쨌든 잘 지내고 있다'는 의미로 쉽게 받아들여지곤 합니다. 

이건 영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비즈니스 business'의 어원이 'busy+ness'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Engaged in action'이라는 뜻을 갖고 있지요.) 영어 뿐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이 말은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은 바빠보인다는 거죠. 큰 돈을 벌어야 하니 시간을 쪼개써야 하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니 바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공'일까요? '성공 = 바쁨' 혹은 '바쁨 = 성공'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니라면 바쁨의 동의어, 그리고 성공의 동의어는 무엇일까요? 경제적인 풍요도 좋고, 남들로부터 존중받는 것도 좋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성공은 자기 만족, 자기애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성공은 시간과 큰 관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바쁘다는 말의 올바른 뜻은?"

속도(에 대한 강박)은 깊이있는 것들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합니다. 산과 나무와 바다를 보지 못하고, 거리와 높이, 넓이로만 우리의 시야를 규정하도록 합니다.  

저는 '바쁘다'는 말을 '내가 하는 일을 즐긴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하는 편입니다. 제 일이 지향하는 목표를 알고 저 역시 그를 지향하기 때문에 제가 하는 일은 저 스스로 원하는 일이고, 따라서 제가 하는 일은 저를 즐겁게 하는 거죠. 즐거운 무언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정신이 팔리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외 다른 일에 신경쓸 겨를이 적어지고, 바쁘게 되는 겁니다. (제가 즐기지 않는 일 때문에 정신 없는 경우를 일컬을 때 저는 속어로 '짜친다'는 표현을 쓰지요.^^ '쪼들리다'의 사투리라는데 그보다는 좀 더 구차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표현입니다. 표준어로는 어떤 표현이 맞을지 잘 모르겠네요.) '바쁘다'는 말을 '바빠보이니 성공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느냐'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그는 이미 (1) 바쁨 자체에 의미를 두는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2) 시간의 노예일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시간은 시계가 아니다."

때때로 우리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게 우리를 둘러보고 깊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경치를 바라보며 거리와 높이에 대해 말하지 않고 나무와, 산, 강에 대해 이야기하듯, 우리의 삶 역시 그같은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위해 목표를 세우고, 그를 위해 시간을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구획지어 설명하는 경우가 생길 수는 있겠지만, 필요 이상으로 토막내거나, 우리 자신을 '시한'이라는 틀에 가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속한 조직의 효율적인 운영과 조직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되겠지만, 저는 그것조차 다시 한번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쫓기는 삶이나 쫓는 삶이나 둘 다 팍팍하긴 마찬가지일텐데, 쫓기거나 쫓는 대상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면 몇백 배는 더 팍팍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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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car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