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ibbles2009. 7. 20. 09:27

2003년 10월에 입사해서 2년여 동안 브랜드마케팅연구소에서 일하다가 2006년 1월 조직개편을 맞아 인터랙티브팀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1년 반 정도 옮기고 싶다고 조른(?) 덕분이었죠. 학부는 신문방송학과를 나왔지만 그 이후에는 쭉 온라인 광고부터 시작해서 IPTV까지 인터랙티브 마케팅과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었기 때문에 인터랙티브팀에서도 꼭 일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팀 이름은 '인터랙티브 미디어팀'이었습니다. 소속 본부도 마케팅 본부나 광고 본부가 아니라 매체 본부라는 점 때문에 '혹시 매체 업무만 하게 되는건 아닌지'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제일기획이 원래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 붕괴 이전) 인터넷 본부를 운영했던 전력도 있었고, 비록 2006년 당시에는 본부를 접고 일개 팀 단위로 축소되어 있긴 했지만 온라인 분야의 중요성을 간과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정말 미디어 업무만 하게 되더군요. OTL

이 로고도 제가 마음대로 혼자 만들어서 썼도 인터랙티브 미디어팀 로고입니다.
원본은 Interactive Media Team이라고 돼있는데, 그건 못찾아서 대신.. ^^

 

조직은 조직의 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는걸 크게 느낀 시절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본부가 매체 본부이다보니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관리하는 업무에 중점을 두는 분위기였는데, 팀장 역시 온라인의 '가능성'보다는 주어진 매체 업무에만 초점을 맞추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업무가 '어떤 매체에 얼마 어치 광고를 집행하느냐'에 대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온라인 커뮤니티나 블로그, 어플리케이션 등 '인터랙티브 커뮤니케이션' 자체에 대한 고민은 거의 하지 않게 되는 단점이 생겼죠. (그런데 사실, 그 일만 해도 하루가 벅찰 정도로 바쁘긴 했었습니다. 심지어 당시에는 수수료율이 낮다는 이유로 검색 광고는 대행하지 않았었으니까요.) 오로지 배너 광고 수주와 집행, 그리고 배너가 끌어올 마이크로사이트에 올인하는 구조였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배너광고만 팔면서 살 수는 없으니, 당시 저는 미디어 구매/관리 업무보다 마케팅 업무에 좀더 중점을 두고, 그 쪽 방향으로 후배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교육 기회를 넓히려는 시도를 했었습니다. 당시 팀장의 의견과 달라 마찰도 많이 빚었죠. 대신 좋은, 능력있는 후배들을 많이 알게 되어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인터랙티브 미디어팀으로 옮기고 꼭 1년 후인 2007년 1월, 제일기획은 '글로벌인터랙티브팀'을 신설합니다. 제일기획이 담당하는 해외 광고--99% 삼성전자 광고입니다--를 온라인에서 집행하기 위한 전략을 짜고 실제 집행까지 하는 것, 게다가 삼성전자가 기존에 운영하던 해외 웹사이트를 완전히 뒤집고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업무가 주어졌죠.

말은 간단해 보이지만, 열 군데도 넘는 국가에서의 온라인 전략을 짜는 것도 엄청난 일인데 집행까지 하라는 것은, 팀이 아니라 하나의 회사가 할 일입니다. 게다가 삼성전자의 웹사이트를 만든다는 건 단순한 사이트를 만드는 차원의 일이 아니죠. 수십개국의 사이트를 만들고, 이들이 각각 연결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마케팅, 그리고 아마 판매, 물류관리까지도 연계가 되어야 할테니, 이건 일개 팀이 맡아서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비롯, 단 4명을 그 팀으로 발령을 냈습니다.-_-; 

팀 설립 당시에는 팀장도 공석이었는데, 다음 달에 신임 팀장이 외부에서 스카웃되어왔고, 한 두 명씩 불어나더니 가을에는 30명에 달하는 제일기획 내 최대의 팀이 됐습니다. 30명이 넘어도 사람은 언제나 크게 모자랐죠. 하도 격무에 시달리다보니 업계에 소문이 나서, 안에서는 사람이 모자란데 바깥에서는 지원을 기피하는 현상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8년 봄 제일기획은 인터랙티브 관련 움직임을 더욱 강화, 인터랙티브 사업 추진을 위한 별도의 본부를 구성하기에 이릅니다. 기존에 이미 있던 인터랙티브 미디어팀과 글로벌 인터랙티브팀을 한 곳에 모으고, 국내 인터랙티브팀과 제작팀 등을 신설해 'The i' 라는 조직을 만든거죠. (관련 기사. 공식명칭도 'The i'고 언론 등에도 'The i', '디아이' 등으로 표기됩니다만 안에서는 다들 '아이본부'라고 부릅니다.^^) 같은 해 초에 영문 사명(社名)을 Cheil Communications에서 Cheil Worldwide로 바꾸는 등 글로벌 마케팅에 큰 비중을 두기로 한 데다가, '인터랙티브 분야가 성장동력이다'라고 천명을 해놓은 상태니 글로벌 인터랙티브팀의 어깨가 아무래도 무거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새로 바뀐 제일기획 로고입니다. Cheil 부분은 변화가 없죠.

The i 로고구요. 사람들마다 제각각 다르게 부른다는 점에서, 담고 있는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이 애매하다는 점에서 브랜딩 관점에서는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더군요.


그 팀에서 보낸 2년 반은 정말 여러가지를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광고주들이 많은지 (이건 대행사에 계신 분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실..^^), 외국인 사대주의가 우리나라에 얼마나 팽배해 있는지, 사람의 인성이 실력보다 얼마나 중요한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끼기도 했지만, 가장 큰 배움은 저 자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공부를 아무리 오래 했어도 실전에서의 경험에 비교해 볼 때 그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일 수 있는지.
책 속에 숨어있는 글 외에, 학교에 몸담고 있는 학자들 말고도, 업계에 흩어져 있는 고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나의 지식과 경험은 얼마나 부족한 것인지를 느끼게 된거죠.

이런 걸 깨달을 때마다 동료들과 나누고 함께 공부했어야 하는데, 하루하루의 일에 치여 미래를 준비하는 일은 계속 미뤄왔던 셈이죠. 돌아보면 제가 했던 일들은 '현재를 준비하는' 일이 대부분었던 것 같습니다. 당장 닥친 온라인 캠페인 관련 업무, 팀 내외 교육 준비, 팀 조직 업무 등으로 항상 눈코뜰새 없었죠.

그런 일들 때문에 인터랙티브 마케팅의 전략 기획 업무나 미래를 위한 학습 등 정작 중요한 일에는 소홀했던 것이 가장 아쉽습니다. 앞으로의 청사진을 충분히 그리지 못해 지금 남아있는 후배들이 고생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구요. (그러고 보면 위에서 '조직의 윗사람이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은 제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은 봤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일에 파묻혀 있었다는 점에서는 죄질이 더 나쁘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심지어 사보 표지모델로도 나왔습니다. (2007년 12월호)
영광스런 일이긴 한데, 평생 지우고 싶은 사진이죠.. ^^
사보 나온 이후 다니던 미용실 바꿨습니다.


힘든 시간들도 많았지만 대부분 즐겁고 신나는 날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은 다름아닌 함께 일했던 선후배와 동료들이죠.

거의 6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나와서 제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해왔던 일이 이 바닥 일이다보니, 새로 시작하는 일 역시 같은 일일 수 밖에 없겠죠. 대신 이제는 현재에 파묻히지 않고, 미래를 그려가는 일을 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만 잘 사는 일이 아니라, 남들을 돕고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제가 제일기획에 있을 때 후배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것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ecarus